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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두 영화 <여덟 개의 산>과 <오펜하이머>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대학 현장도 예전의 아카데믹한 분위기는 아련한 향수가 된 지 오래다. 탄탄한 기본기와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 기초학문 분야는 이제 찬밥 신세이고, 그저 먹고 사는 일이나 취업에 필요한 교육이라야 통한다. 이러한 세태가 우려스러운 건 소위 깊이(depth)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는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지혜마저도 요즘의 휘황찬란한 문명 속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깊이 있는 것들이 더 좋다. 겉만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은 내 눈에 시시하게 보인다. 특히나 요즈음 제작되는 잔인하거나 폭력성 짙은 한국 영화들은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극장에 가본 기억도 까마득하다. 그런데 실..

나의 이야기 2023.09.22

고향 나들이 - 2023년 9월 16일(토)

추석이 가까워져 오니 고향집에 한 번은 다녀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떨쳐내기 위해 주말에 시간을 내기로 했다. 연로하신 어머님을 멀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사정이 때로는 답답하다. 내 직장 때문에 멀리 떨어져 지낸 세월이 길다보니 이제는 고향집에 가는 일이 점점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명절 때의 지독한 교통정체를 피해 올해부터는 설날과 추석 연휴 전에 고향집을 다녀오기로 했다. 아들이 결혼한 후로 우리집에서 명절을 쇠자는 아내의 소신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가는 길이 멀고 고달파도 고향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마음이 포근하다. 새벽에 서울을 출발하여 빗길을 뚫고 광주시 망월동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 장인어른과 장모님 산소에 헌화하고 묵념하는 것으로 고향 나들이 일정을 시작했..

나의 이야기 2023.09.20

인수봉 크로니길 - 2023년 9월 10일(일)

어제는 모처럼 북한산 노적봉에서 한가로운 멀티피치 등반을 즐겼다. 오랜만의 북한산 나들이여서 산에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예상보다 일찍 끝난 등반 때문에 산성 주릉을 타고 대동문으로 돌아가는 하산길을 길게 잡은 것이 조금은 무리였던 듯하다. 경미한 허리 통증 탓에 오늘은 단피치 암장에서 게으른 등반을 하리라 내심 마음 먹고 있었다. 양주 불곡산의 독립봉 암장에 가기로 했었는데, 기범씨가 갑자기 인수봉에 가고 싶다고 했다. 카톡으로 가고 싶은 루트를 물어보길래 대뜸 '크로니길'이라 답했다. 그래서 갑자기 인수봉에서 가장 길다는 크로니길을 정코스로 등반하여 간만에 정상을 밟아 보는 것으로 등반 약속이 변경되었다. 주말이면 클라이머들로 붐비는 인수봉 바윗길이기에 크로니길 같이 구불구불하고 긴 루트를 ..

암빙벽등반 2023.09.11

북한산 노적봉 써제이길 - 2023년 9월 9일(토)

아침 저녁으로는 초가을답게 선선하고, 한낮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날씨다. 7시 정각에 우이동에서 일행들과 만나 노적봉 등반에 나서기로 한다. 주말 이른 아침에 우이동으로 향하는 경전철 안의 승객은 대부분이 등산객 차림이다. 지난 8월에 스위스에서 아침마다 알프스 트레킹에 나설 때의 풍경과 어딘지 닮아 있는 인상이다. 체르마트의 등산열차와 사스페의 버스 안은 아침 시간엔 거의 등산객들로 가득 찼었다. 아름다운 북한산 국립공원과 인수봉을 품고 있는 서울시 강북구도 어찌 보면 산악마을인 셈이다. 스위스의 유명 산악마을들 못지 않게 수 많은 등산 애호가와 클라이머들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매력 넘치는 동네에 내가 살고 있다는 감사함과 은근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도선사에서 용암문을 통해 노적봉 바윗길 앞..

암빙벽등반 2023.09.09

[2023 스위스 알프스 - 에필로그] Thanks to Alps

나의 2023년 상반기는 여느 해보다 힘겨운 나날이었다. 작년 하반기에 치른 아들 결혼식과 장인어른 장례식을 비롯한 굵직한 가정사를 단기간 내에 감당해내야 했던 피로감이 뒤늦게 몰려온 듯했다. 내 몸의 취약점 중의 하나인 눈에 문제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실명의 위기에 몰렸을 망막 박리증이 발병한 것이다. 다행히도 발달된 현대 의학의 수혜를 받을 수 있었다. 망막수술 직후에 2주 동안 침대에서 엎드려 지내야 하는 고역을 치른 후에도 수술의 여파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컸다. 평소의 소신은 사라지고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고 우선은 버텨내고 보자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직장일과 클라이밍에서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무심한 시간은 흘러서 ..

해외트레킹 2023.09.06

[2023 스위스 알프스 #11] 알프스를 떠나 제네바로 - 8월 16일(수) ~ 17일(목)

제네바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더웠다. 사스페와 체르마트에서 각각 5일 동안 머물면서 시원한 알프스 산하를 트레킹 했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기 싫은 탓이었까? 제네바가 깨끗한 도시임에는 분명하지만 대도시의 혼잡함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네바가 처음인 아내와 함께 레만호 둘레를 산책했다. 제트분수와 꽃시계 정원을 구경하고 루소 동상도 둘러보았다. 제네바는 20년이 넘은 오래 전에 처음 와 본 이후로 한두 차례 지나친 기억은 있는데, 많은 것이 변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내 기억의 부정확성도 한 몫 했을 터이다. 마음 같아선 허선생님이 말씀해 준 반대편 호반에서 볼 수 있다는 몽블랑을 먼 발치에서나마 확인하고 싶었으나, 너무 더운 날씨에 의욕이 꺽이고 말았다. 항공권 일정 때문에 공항 옆의 호텔..

해외트레킹 2023.09.03

강촌 유선대 암장 - 2023년 9월 2일(토)

안개 낀 강촌의 아침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편의점에서 테이크아웃으로 사온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의 향기를 음미하면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강선사 아래로 흐르는 북한강과 삼악산 줄기의 고요한 모습이 새삼 반갑다. 코앞에 보이는 밤송이의 토실토실 영글어 가는 모습이 탐스럽다. 벌써 가을은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인 듯하다. 이제 무더위도 한풀 꺽였으니 이번 가을 시즌의 즐거운 클라이밍을 위한 몸과 마음의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한다. 우선은 익숙한 유선대 암장에서 그동안 멀어진 바위에 대한 감각을 되살려 보기로 한다. 멀티피치 등반을 위한 시스템도 점검하면서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다는 만족감이 남는다. 주말 동안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들과 관련한 기분 좋은 소식이 많았다. ..

암빙벽등반 2023.09.03

[2023 스위스 알프스 #10] 회른리 산장(Hörnlihütte, 3260m) - 8월 15일(화)

마터호른(Matterhorn, 4478m) 초등에 얽힌 이야기는 이 봉우리의 웅장하고 수려한 풍채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체르마트 출신의 저자 트루퍼(Beat P. Truffer)가 쓴 라는 책에 의하면, 에드워드 윔퍼(E. Whymper)가 이끈 영국 등반대는 체르마트를 출발하여 슈바르츠제(Schwarzsee, 2583m) 호수를 지나 지금의 회른리 산장(Hörnlihütte, 3260m) 부근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1865년 7월 14일에 회른리 능선을 통해 역사에 길이 남을 마터호른 초등에 성공한다. 윔퍼의 영국 등반대가 등정에 성공한 직후 그들은 정상에서 불과 200미터 아래에서 리온 능선으로 올라오고 있는 카렐의 이탈리아 등반대를 발견한다. 윔퍼의 승리를 확인한 카렐은 그 자리에서 등을 돌려 ..

해외트레킹 2023.08.31

[2023 스위스 알프스 #9] 에델바이스벡(Edelweissweg) - 8월 14일(월)

체르마트 동편 언덕에 자리한 숙소에서 보면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이 맞은편 서쪽 언덕을 밝게 비춘다. 가파른 그 언덕 중앙부의 절벽 위에는 에델바이스 산장이 조그맣고 하얀 상자처럼 얹혀져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올려다 보인다. 오늘은 이 언덕 위의 고원지대인 호흐발믄(Höhbalmen, 2665m)에 올라 마터호른 북벽 아래의 쯔무트빙하(Zmuttgletscher)에서 내려오는 협곡을 따라서 체르마트로 돌아오는 코스의 산길을 걸었다. 이 트레일은 체르마트 하이킹 지도에 '에델바이스벡(Edelweissweg)'이란 트레일로 표기되어 있다. 정코스로 걷는다면 전체 길이가 20km에 이른다고 한다. 독일어로 '벡(weg)'은 길을 의미한다. 체르마트(1620m) 중앙광장에서 에델바이스 산장(Edelweiss A..

해외트레킹 2023.08.30

[2023 스위스 알프스 #8]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3089m) - 8월 13일(일)

체르마트에서 가장 유명한 전망대는 아마도 고르너그라트(Gornergrat, 3089m)일 것이다. 체르마트 기차역 앞에서 출발하는 등산열차에 오르면 해발고도 3천 미터 이상의 이 고지에 쉽게 닿을 수 있다. 체르마트를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누구라도 고르너그라트 등산열차를 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서는 체르마트의 상징과도 같은 마터호른(Matterhorn, 4478m)과 알프스 2위봉인 몬테로사(Monte Rosa, 4634m) 뿐만 아니라 여러 빙하를 동시에 관망할 수 있다. 몽블랑(Mont Blanc, 4807m) 다음으로 높은 몬테로사 산군의 최고봉인 두포우르슈피츠(Dufourspitze, 4634m)는 스위스령에 속하여 스위스 알프스 최고봉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오늘의 트레킹..

해외트레킹 2023.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