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대학 현장도 예전의 아카데믹한 분위기는 아련한 향수가 된 지 오래다. 탄탄한 기본기와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 기초학문 분야는 이제 찬밥 신세이고, 그저 먹고 사는 일이나 취업에 필요한 교육이라야 통한다. 이러한 세태가 우려스러운 건 소위 깊이(depth)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다는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지혜마저도 요즘의 휘황찬란한 문명 속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깊이 있는 것들이 더 좋다. 겉만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은 내 눈에 시시하게 보인다. 특히나 요즈음 제작되는 잔인하거나 폭력성 짙은 한국 영화들은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극장에 가본 기억도 까마득하다.
그런데 실로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인 영화 두 편을 만났다. 긴 영화들이었지만 시종일관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었다. 내게는 두 편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깊이가 느껴지는 명작으로 보였다. 오늘 보았던 <여덟 개의 산>은 알프스와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한 산악영화이다. 지난 여름에 알프스 트레킹을 함께 다녀온 허선생님이 다음 카페 '고알프스'에서 추천해 주신 영화이다. 때마침 오늘 오전에 짬을 낼 수 있어서 아내와 함께 노원역에 있는 영화관까지 가서 보았다. 무엇보다 프로 산악인들의 등반기가 아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삶을 녹여낸 영화라서 좋았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처럼 잔잔하지만 감동적인 영화였다. 명작의 반열에 올려 놓아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2시간 반 동안의 상영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등산을 좋아했던 나의 지난 날들이 오버랩 되는 장면들이 많았다. 아련한 향수와 함께 재미와 감동의 깊이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가족과 직장을 위한 책임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산에 대한 꿈과 낭만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주인공 아버지의 삶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슬프기도 했다.
한편, 9월의 첫날에 보았던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는 나의 대학시절 우상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학 중에서도 확률론을 전공한 내게는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그, 닐스 보어, 오펜하이머, 파인만 등과 같은 현대물리학의 거장들이 실질적인 선생님들이었다. 물론 영화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한 연구원들인 당대의 수학과 물리학 천재들의 면면을 보는 재미가 나에겐 가장 큰 기쁨이었다. 원자폭탄 개발 당시 가장 우려했던 것은 연쇄폭발이었다. 만일 원자폭탄이 폭발하면서 대기 중의 소립자와 결합해 연쇄 폭발이 일어난다면 지구 전체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하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확률 계산을 담당했던 학자들은 연쇄폭발의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은 그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말보다 제로라는 확신을 듣고자 했다. 내가 박사과정 때 긴 시간에 걸쳐 아주 복잡다단한 확률적 계산에 매달렸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 또한 런닝타임 3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모든 장면들에 몰입해서 빠져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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