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트레킹

[2023 스위스 알프스 - 에필로그] Thanks to Alps

빌레이 2023. 9. 6. 13:20

나의 2023년 상반기는 여느 해보다 힘겨운 나날이었다. 작년 하반기에 치른 아들 결혼식과 장인어른 장례식을 비롯한 굵직한 가정사를 단기간 내에 감당해내야 했던 피로감이 뒤늦게 몰려온 듯했다. 내 몸의 취약점 중의 하나인 눈에 문제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실명의 위기에 몰렸을 망막 박리증이 발병한 것이다. 다행히도 발달된 현대 의학의 수혜를 받을 수 있었다. 망막수술 직후에 2주 동안 침대에서 엎드려 지내야 하는 고역을 치른 후에도 수술의 여파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컸다. 평소의 소신은 사라지고 그저 하루하루를 견디고 우선은 버텨내고 보자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직장일과 클라이밍에서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무심한 시간은 흘러서 무탈하게 한 학기를 보내고 여름방학을 맞이할 수 있었다. 눈앞에 놓인 일상이 버거웠기에 8월에 계획된 스위스 알프스 트레킹에 대한 설레임 따위는 사치처럼 여겨졌다. 때로는 괜히 예약했다는 후회도 들곤 했었다. 

 

7월엔 크로티아 출장을 다녀왔다. 4년 만의 해외 나들이인지라 내심 걱정스러운 면이 많았었다. 결과적으론 모든 것이 알찼던 출장이었다. 크로아티아 출장은 수동적이고 침체되어 있던 나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반전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활발히 연구에 매진하는 석학들의 모습에서 자극을 받은 탓인지 출장을 다녀온 후에는 오히려 몸에 활기가 생기는 듯했다. 그 즈음엔 8월의 스위스 여행을 은근히 기다리는 마음까지 발동했다. 그런데 알프스 트레킹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지 않은가? 항상 그리운 알프스의 품에 다시 안기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지만, 정작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는 힘든 산행을 감내해야 한다는 새로운 걱정이 앞섰다. 냉정하게 평하자면 아내와 나의 신체는 긴 산행을 즐길만한 체력을 갖춘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내는 평소에 등산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다. 산을 좋아하는 남편을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서는 알프스 트레킹이니 만큼 얼마나 즐거워 할지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스페에 입성한 순간부터 출국 전의 자잘한 걱정거리는 까마득히 잊혀졌다. 2010년 6월 초순에 샤모니와 체르마트 인근을 나홀로 트레킹 하고 다녔던 때의 설레임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사스페는 예전에 느꼈던 알프스 산골마을의 한산하고 정감어린 정취를 오롯히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무엇보다 좋았다. 상대적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보였던 체르마트는 13년 전에 비해 유명 관광지처럼 변해가는 모습이 아쉬운 대목이었다. 사스페에서의 트레킹은 전반적으로 한적해서 마음까지 평화롭게 해주었고, 체르마트에서는 날마다 새롭게 보이는 마터호른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았다. 마터호른은 안나푸르나 트레킹 때 시종일관 보였던 마차푸차레 같이 체르마트 시내에서 뿐만 아니라 주변 산길을 걷는 내내 우리를 따라 다녔다. 스위스에서 돌아온 후 아내는 다소 힘든 여행이었지만 이번 트레킹을 통해 산에 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이 나에겐 무엇보다 큰 기쁨이었다.       

  

▲ 트레킹 첫날, 랑플루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본 사스페 마을.
▲ 설산 아래 고지대에 자리한 사스페는 아직까지 알프스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어서 좋았다.
▲ 겨울엔 스키어들로 붐빌 마을이지만, 사스페 마을에서 한가로운 여름 휴가를 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스페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노부부처럼 개와 함께 마을 주변을 천천히 배회해도 좋을 것 같았다.
▲ 다시 사스페에 갈 기회가 온다면 브리타니아 산장에서 적어도 하룻밤은 머물 것이다.
▲ 브리타니아 산장 앞마당에서 보이는 마트마크 호수에서 출발해 빙하를 건너 산장에 갈 것이다. 그래서 산장 앞의 암벽에서 비아페라타 코스를 오를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즐겁다.ㅎㅎ
▲ 체르마트에서는 아침마다 마터호른을 올려다 보았다.
▲ 마터호른 정상부의 구름은 시시각각 변했다.
▲ 체르마트 주변을 트레킹하다 보면 사스페 지역과 달리 작은 마을들을 가끔 지나치게 된다.
▲ 산길 중간에 만나는 작은 마을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남달랐다.
▲ 체르마트 인근에서는 산길 중간의 레스토랑인데도 대기 중인 손님들이 많았다.
▲ 여느 유명 관광지 못지 않게 체르마트 거리는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 체르마트 시내는 알프스 산골마을답지 않게 예전보다 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 체르마트는 마터호른 덕택에 존재하는 마을 같았다.
▲ 마터호른 정상 등정을 위한 등반 출발점의 성모상까지 올라갔던 순간이 좋았다.
▲ 다음에 체르마트에 갈 기회가 온다면, 나도 마터호른 정상 등정에 도전하는 클라이머일 것이다.
▲ 회른리 산장에서 하룻밤 보내면서... 회른리 능선을 통해 마터호른 정상에 오르는 상상을 해본다.
▲ 이번 스위스 알프스 트레킹은 우리 부부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추억거리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