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추석이 다가올 무렵이면 기범씨는 내게 인수봉 정상에 올라가서 보름달을 보자고 꼬드겼다. 그때마다 나는 고향집에 다녀와야 해서 "참석불가"라는 멘트를 날려야만 했다. 내가 못 갈 줄 뻔히 알면서도 놀리듯이 추석 보름달 등반 계획을 내게 알렸던 게 분명하다. 자기는 추석 당일에도 등반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몸이란 걸 은근히 과시하는 기범씨가 한편으론 얄밉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엔 내 사정이 달라졌다. 작년 가을에 아들 녀석이 결혼한 후로는 명절을 머나먼 고향집이 아닌 우리집에서 쇠기로 했다. 고향집에는 2주 전에 미리 다녀왔다. 처음으로 추석 당일에 등반할 수 있는 여유가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때마침 기범씨도 매년 하던 추석날 보름달 등반을 어김 없이 공지했고, 나는 홀가분하게 "참석가능"으로 화답했다.
우이동에서 오후 2시 즈음에 기범씨와 은경이를 만나서 천천히 산길을 올라 인수봉 남면 여정길 앞의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해가 창창한 오후 3시 반 무렵의 시간인데도 인수봉 남벽의 여러 바윗길에 아무도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이 조금은 낯설었다. 마당바위에서 잠시 쉴 때, 일본인 예닐곱 명이 등반을 마치고 하산하면서 우리와 "사요나라"를 주고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다른 등반팀은 볼 수가 없었다. 추석날 이 시간에 사방이 고요한 인수봉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풍요로웠다. 기범씨와 내가 짬봉길에서 몸을 풀고 난 직후에 승호씨와 경욱씨가 합류했다. 우리 4명은 곧바로 서면의 하강지점으로 이동하여 '천방지축' 루트를 통해 정상에 올랐다. 은경이는 아직 허리 상태가 온전치 않아서 등반은 하지 않기로 했다.
오후 6시 무렵에 시작한 등반은 정상에 올라서서 보름달을 감상하는 커피타임을 갖고 하강을 마무리할 때까지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기범씨의 원활한 리드로 경험 많은 악우들이 팀을 이루었으니 등반이 지체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안전하고 신속한 등반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인수봉에 수 차례 올랐어도 정상에서 서울의 야경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오락가락 했으나 한가위의 정취를 느끼기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맑은 공기 덕에 서울의 야경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산길을 내려올 때는 열대야를 피해서 북한산에 올라 밤새 12성문 종주와 향로봉 릿지 등반을 감행했던 예전 산행의 추억들이 생각났다. 하루재 위에서 다시 올려다 본 보름달을 달무리가 감싸고 있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그 모습 속에는 어릴 때 달빛 아래에 모여서 동무들과 함께 갖가지 재밌는 놀이로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서려 있는 듯 보였다. 오늘이 처음인 인수봉 야간 등반도 또 하나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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