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트레킹

허 선생님과 함께 오른 팔공산 - 2014년 11월 14일

빌레이 2014. 11. 16. 19:48

서울역에서 아침 8시 10분에 출발하는 동대구행 KTX에 몸을 싣는다. 샤모니에서 돌아온 허선생님을 만나기 위함이다. 허샘이 한국에 올 때마다 대구를 방문하는 게 나의 즐거운 연중 행사 중 하나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나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얼굴 한 번 보고 그간 쌓인 이야기 나누며 산길을 함께 거니는 것만으로 우리가 만날 이유는 충분하다. 허샘과 나는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하는 바가 비슷해서 그런지 말이 잘 통했다. 허샘은 동시대를 살아온 세대라는 점 외에도 유럽과 알프스, 산과 책 등을 좋아한다는 등의 공통점이 많아서 쉽게 끌렸다. 그런 연유로 허샘을 만나러 가는 길은 항상 정다운 친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기분 좋은 여정이다.

 

서울과 대전 사이 구간의 철길 주변은 도회지의 변두리 모습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대전역을 지나면서 기차의 창밖은 점차 자연스런 풍경을 보여준다. 노랗게 물들어 있는 낙엽송 군락이 야트막한 산자락 사이에 자리한 모습이 늦가을의 정취를 전해준다. 무심코 펼쳐든 KTX 매거진에 노벨상 관련 칼럼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에게는 최고의 영광으로 추앙받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장 폴 사르트르의 글이 인상적이다. 프랑스의 지성이라 불리는 사르트르가 밝힌 수상 거부의 이유는 이렇다. "작가는 자신이 하나의 제도로 전환되는 일을 피해야 한다. 그 전환이 아무리 명예스러운 모습을 가진 것이더라도." 이 글을 대하는 순간 나의 뇌리에는 허샘의 삶이 떠오른다.

 

우리 나라의 전문 등반가 중에서 허샘만큼 알프스 곳곳을 누비고 다닌 사람은 흔치 않다. 알프스의 3대 북벽을 하나의 훈장처럼 내세우던 세태 속에서도 마터호른 북벽 등반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훈장을 사양했던 사람이 바로 허샘이다. 나는 그가 알프스 3대 북벽 완등이라는 목표에 매달렸다면 충분히 달성했으리라 생각한다. 등반의 순수성을 잃기 쉬운 세상의 영광스런 업적들에 초연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허샘의 순수함과 변치 않는 산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꾸준히 좋은 산서들을 출간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가 펴낸 알프스 관련 산서들에는 가감없는 진솔함과 때묻지 않은 순수성이 깃들어 있다.

 

동대구역에서 반갑게 만난 우리는 곧장 팔공산으로 향한다. 예전 어느 봄날에 잠깐 함께 거닐던 기억이 있는 북지장사 인근의 오솔길을 따라 산에 오른다.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 아늑한 오솔길이 걷기에 그만이다. 전망 바위가 일품인 인봉을 지나면서부터 조망이 트인다. 능선 왼쪽으로 골프장이 보인다. 동화사에서 팔공산 주능선을 올려다 보았을 때 오른쪽 부분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부터 팔공산의 가보지 않은 부분인 동화사 우측 주능선을 오르고 싶었는데 허샘이 그런 나의 속내를 알기나 한 것처럼 산행 코스를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에 허샘이 더욱 살갑게 느껴진다. 노적봉을 올라서면 갓바위가 있는 관봉에서 올라오는 주능선과 만난다. 노적봉 언저리의 아늑한 곳에서 허샘이 보온 밥통에 담아 온 찰밥으로 점심 식사를 한다.

 

팔공산 주능선을 허샘과 둘이서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 나누다보니 산에 있는 시간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퇴근 이후에 하산 시간을 맞춰 마중 나오시기로 한 장선생님과의 약속 시간을 염두에 두고 신령재에서 폭포골을 따라 하산길에 접어든다. 폭포골의 물줄기가 서쪽으로 기우는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곡선이 아름답다. 어둠을 몰고오기 직전에 보여준 석양은 선명한 주홍빛을 보여준다. 순간적으로 보여준 아름다운 빛깔의 저녁해를 붙잡아 두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어둡기 전에 발길을 재촉하여 장선생님의 차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하산을 마무리 한다. 산에서 내려오자 마자 누군가 마중 나와 있다는 것이 대접받는 기분이다. 저녁 밥상 차려 놓고 기다리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 같은 포근함이 느껴진다. 솔밭이 많은 팔공산 아래의 송이순두부는 언제 먹어도 맛깔스럽다. 부군인 허샘 만큼이나 말이 잘 통하는 장선생님과의 대화도 언제나 유쾌하기 그지 없다.

 

맛있는 저녁을 대접받고 소화를 겸해서 허샘 부부가 다니는 암장을 방문한다. 아담한 실내 암장으로 볼더링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실내에서도 리드 등반을 자주 하는 내게는 볼더링 동작이 어렵다. 장선생님과 허샘은 역시나 유연한 동작으로 편하게 운동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다. 요즘 대구에서는 클라이밍 짐이 붐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40여 개의 실내 암장이 개장되어 있다고 하니 대구의 클라이밍 열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암장에서의 운동을 마무리 하고 집 근처의 호프집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뜨끈한 어묵 국물에 몇 잔의 술이 곁들여 진다. 오가는 대화 속에 쌓여가는 우정이다. 맘 같으면 밤새워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분위기를 아쉬움 속에 마무리 짓는다. 허샘이 펴낸 알프스 관련 산서들이 책장에 쌓여 있는 방에서 달콤한 하룻밤을 보낸다. 허샘의 책을 찾는 이들이 많아져서 빈 책장이 늘어나기를 기원해본다. 다음 날 오전의 둘레길 산책까지 허샘 부부와 함께 한 1박 2일의 대구 나들이가 내 삶에 산소 같은 신선함을 공급해 주었다. 항상 편안하게 맞아주시는 두 분이 있어 대구는 나에게 정다운 고향 같은 곳이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