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클라이밍 스쿨에 다닌지 6주가 지났다. 아주 조금씩이나마 발전해가는 등반 능력을 몸으로 느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주당 2회씩 받는 2개월 과정의 초급반 교육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직벽에서 리드 등반하면서 반복적으로 추락을 연습한 최근의 교육 내용은 내게 여러 모로 뜻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발목 골절 사고 이후의 수술과 재활 과정의 혹독함이 연상되어 등반할 때에 추락 자체를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게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볼더링 과정에서도 어렵게 보이는 홀드를 잡기 위해서 매트 위로 끝없는 추락을 경험한 이후에라야 조금씩 진전된 모습을 맛볼 수 있었기에 추락 없이는 발전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는 저절로 내 몸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바닥에 쿠션 좋은 매트가 있고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떨어지는 볼더링의 추락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도 않아서 누구나 부담없이 추락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자일을 묶고 등반하는 가운데에서의 추락은 심적으로 많은 부담을 준다. 교육시간에 강사의 빌레이를 받으며 다른 교육생들 앞에서 제일 먼저 시범 케이스로 리드 등반과 추락을 연습하게 되었다. 발목 수술 이후에 추락을 허락하지 않으리라던 마음 속의 다짐을 스스로 깬 순간이다. 볼더링에서와 같이 등반 시에도 추락의 경험 없이 등반 능력의 수준 향상은 바랄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은 자명하기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다. 어차피 경험할 추락이라면 아직은 어설픈 교육생보다는 전문가의 빌레이를 받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란 얄팍한 계산도 깔려 있어서 나서게 되었다. 다른 교육생들이 선뜻 앞으로 나서지도 않아서 그나마 자연 암벽에서 선등 경험이 있는 내가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 까닭도 있다.
리드 등반을 하면서 퀵드로에 자일을 클립하는 기분이 상쾌했다. 5개의 퀵드로에 클립하고 추락을 해야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아래를 한 번 살짝 내려다본 후 미련 없이 두 손을 놓고 벽에서 추락했다. 순간적으로 2~3 미터를 추락했으나 팽팽하게 당겨진 자일이 든든하게 나를 붙잡아주는 느낌이 괜찮았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다시 추락을 반복해도 공포감은 사라지고 부상 없이 안전하게 추락하는 방법을 상기하고 있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결코 추락하지 않겠다는 완고함을 깨고 레벨업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임한 결과 또 한 번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기뻤다. 실전이라 할 수 있는 자연 암벽에서 추락 없이 더욱 안전하고 즐거운 등반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위험 요소가 배제된 인공 암장에서 추락을 무서워하지 않고 부단히 연습할 수 있는 자세를 갖췄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밀려왔다. 동료 교육생의 빌레이를 받는 가운데에도 여러 번의 추락 연습이 이어졌고, 생각보다는 자연스럽게 추락을 받아들였다.
예전부터 스포츠클라이밍에 대한 나의 견해는 부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인공 홀드를 잡는 손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연 바위에서 느껴지는 듬직함이 인공 홀드에서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꼭 플라스틱 장난감을 만지는 기분 같았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일상을 떠나 자연에서 즐기는 등반에서마저 경쟁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경기를 하고 관중의 환호 속에 서로의 기량을 뽐내야 하는 스포츠클라이밍이 저속하게 여겨지기도 했었다. 스포츠클라이밍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나의 생각에 변화가 찾아온 건 최근에 짬짬이 보고 있는 책 속에서 제프 로우(Jeff Lowe)와 카트린 데스티벨(Catherine Destivelle)의 인터뷰를 정리한 글을 읽은 후 그들의 생각에 공감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요세미티 암벽에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볼트 설치가 자연을 해친다는 논란이 일 즈음 제프 로우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인공 암벽에서의 스포츠클라이밍을 선보인다. 그리고 카트린 데스티벨과 자일파티를 이루어 인공 암벽에서의 훈련을 바탕으로 40 피치가 넘는 고 난이도의 트랑고 타워를 멋지게 등반해낸다.
인공 암벽이 자연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했다는 점과 자연 암벽을 좀 더 멋지게 등반하기 위한 훈련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볼더링의 대부로 불리는 존 길(John Gill)은 암벽 등반에서도 체조에서와 같은 우아한 동작이 가능함을 깨닫고 자일 없이 조그만 바위에서 짧지만 어려운 루트를 문제로 만들어 젊은 등반가들이 매달려 성취감을 느끼도록 하였다. 남부 콜로라도 대학의 수학과 교수이기도 했던 존 길은 알버트 머메리처럼 등반의 새로운 영역을 제시한 선각자라 할 수 있다. 실내 암장에서 볼더링을 즐기다 보면 등반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직은 풀어야할 문제들이 무궁무진한 초보 수준이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나도 언젠가는 난이도 높은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을 꿈꾸며 하루 하루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내 모습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요즘이다.
1. 암장의 중앙벽 오버행 구간을 오르고 있는 여성 등반자. 나도 언젠가는 저 루트를 오를 수 있을 것이란 소망을 가져본다.
2. 좌측의 벽도 약간의 오버행을 이루고 있지만 홀드의 형태가 어려운 탓인지 베테랑들도 많은 추락을 경험한다.
3. 볼더링은 보기보다 어렵다. 홀드에 붙어있는 라벨의 색깔과 숫자로 문제별 루트가 결정된다.
4. 요즘 우리 교육생들은 주로 이 곳에서 교육을 받는다.
5. 아직 나는 크럭스를 돌파하지 못하고 있는 루트를 고수들은 슬리퍼 신고도 쉽게 해치운다.
6. 볼더링을 위한 홀드의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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