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빌레이 2014. 1. 8. 22:41

이윤기 씨가 번역한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매우 흥미 있게 읽었다. 대학 시절에 니코스 카찬차키스를 알았지만 그때는 내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듯하다. <희랍인 조르바>란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 기억의 한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끝까지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지금 이 책을 다시 손에 들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매스컴에 자주 나오는 모 대학 교수가 이 책에 감명 받고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 교수직을 버리고 홀로 외국으로 떠났다는 얘기를 신문에서 보았다. 한 사람의 생에 크게 영향을 준 책이라면 한 번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두 번째는 다른 책을 주문하는 과정에서 눈에 띤 책 표지의 붉은 절벽 사이를 가로지르는 협곡 그림이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유럽 사회는 로마 문명과 기독교 문화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아직 희랍의 고대 문명과 그리스정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럽 사회에 면면히 흐르는 기독교적 전통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기에 이 책을 읽는 것이 더욱 즐거웠다. 소설 속의 화자인 <나>는 저자인 카찬차키스다. 그는 크레타 섬에서 광산 사업을 하기 위해 조르바를 고용한다. 섬에서 두 사람이 머물며 지내는 시시콜콜한 일상 속에서 카찬차키스는 조르바라는 인간에 매료된다. 이윤기 씨의 해설에 의하면 카찬차키스는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붓다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소설 속에서의 카찬차키스는 한창 붓다의 사상에 빠져 있는 순간이었다. 책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고자 모색하던 카찬차키스를 부끄럽게 만든 건 야생마처럼 자유롭게 행동하는 조르바의 삶이다. 고행을 통해 천국에 이르려는 것의 실체가 거짓 수도승들의 위선적인 삶이란 걸 통렬하게 까발리는 조르바의 행동은 통쾌하다. 육체와 영혼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대하는 사고의 공허함을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설파한다.

 

책은 시종일관 재미 있게 읽힌다. 우리 나라의 제주도 같은 지위를 점하고 있는 그리스의 크레타 섬은 터키의 지배 하에서 독립 전쟁을 통해 그리스 땅이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 땅이 된 직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나면 크레타 섬에서 한참 동안 살다 온 느낌이 저절로 든다. "새끼 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 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려쳐 잘라버렸어요."라고 태연스럽게 얘기하는 조르바의 모습 속에서는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된다. 소설 말미에 저자는 조르바와 헤어진 후 "세계는 술 취한 사람들처럼 휘청거리고 비틀거렸다. 땅이 갈라지면서 우정이나 애정은 그 속으로 처박혔다."라고 쓰고 있다. 이 표현은 현재의 상황에도 유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세기의 오디세우스>라는 제목으로 쓴 이윤기 씨의 해설은 정말 명쾌하다. 그의 글 중에서 꼭 옮겨놓고 싶은 대목을 여기에 남겨본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른자위 개념이자 카찬차키스가 지향하던 궁극적인 가치의 하나인 '메토이소노(聖化)'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메토이소노는 거룩하게 되기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것이 메토이소노다.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 거룩하게 되기가 바로 이것이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다.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그리스를 여행 할 기회가 온다면 <그리스인 조르바> 때문에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을 통해 꼭 크레타 섬에 찾아갈 것이다.  

 

1. 아토스 산의 수도원을 찾아가는 길을 묘사하는 듯한 표지 그림이 인상적이다.

 

2. 크레타 섬이 들어앉은 지중해의 물빛을 닮은 듯한 하드커버가 내 맘에 든다.

 

3. 연구실에서 연구가 시들해질 때 조용히 집중해서 한 줄 한 줄 읽는 재미가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