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윤창호 씨의 책 <윈터홀릭>을 읽었다. 아니 읽었다는 표현보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감상했다는 게 더 어울린다. 근거리용 안경을 써야하는 눈이 부쩍 나를 힘들게 하는 요즘이다. 깨알 같은 영문으로 쓰인 학술 논문과 씨름하다보면 어느새 경미한 두통이 찾아온다. 약해진 시력과 메마르고 건조한 연구 관련 저작물들이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인 듯하다. 이럴 때면 잠시 의자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창밖을 바라본다. 그래도 머리가 개운해지지 않으면 전공과 관련 없는 가벼운 책을 집어들기 마련이다. <윈터홀릭>은 방학 중인데도 여유를 찾기 힘든 근래의 내 생활 속에서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해준 책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가보았지만 북구는 여전히 내게는 동경의 대상이고 미지인 세계이다. 아이슬란드, 핀란드, 러시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6개국의 여행기로 구성된 이 책은 전문 사진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느낌 있는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언제든 부담 없이 펼쳐들 수 있다. 짧고 간결한 글은 여느 여행기와는 사뭇 다른 감성이 전해진다. 홀로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내게는 많은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자들이 가기 힘든 아이슬란드에서 저자가 세상에 혼자 뿐인 상황을 실감하는 장면은 아무나 경험하기는 힘든 것일 게다.
노르웨이에서 순백의 설원과 혹한 속에서 오로라를 감상한 얘기는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라는 현실을 외면할 순 없겠지만 충분히 낭만적이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뿌쉬킨 등 대문호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일부러 한겨울에 찾은 러시아는 내가 평소 꿈꾸는 여행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내가 러시아를 여행한다면 젊은 시절 심취했었던 러시아의 문학작품들이 연계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캔버스 위에 그려 놓은 유채화로 묘사된 덴마크, 여행자들이 거의 없는 겨울에 찾은 피오르 여행기가 인상적인 노르웨이, 정갈한 아름다움과 성숙된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스웨덴 여행기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올 겨울은 유난히 여유를 찾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방학인데도 해야할 일들이 줄어들지 않는다. 해마다 겨울이면 다니던 빙벽등반도 엄두를 못내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전 정신이 약해진 탓도 있고, 주변 여건이 점점 나를 바빠지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럴 때일수록 기본에 충실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야 한다. <윈터홀릭>에서 저자가 길고도 추운 북유럽의 겨울을 여행하면서도 낭만적인 감성을 전해주었듯 무미건조한 나의 겨울 속에서도 의미 있는 열매를 많이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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