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오콘넬(Nicholas O'Connell)이 1993년에 <Beyond Risk: Conversations with Climbers>라는 제목으로 발간한 것을 허긍열 선생이 한글로 번역하여 1996년도에 출판한 이 책은 17 명의 유명한 등반가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저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이 등반가이기도 한 저자가 당시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등반가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진솔한 얘기들이 기록되어 있음을 책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매스컴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된 내용만을 편집해서 보여주는 인터뷰와는 달리 한 편 한 편 집중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등반사에서 의미있는 족적을 남긴 등반가들의 허물없이 정직한 생각들을 바로 옆에 앉아서 듣는 듯한 생생함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마다 전해진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10년 10월 4일에 종로의 교보문고에서 역자인 허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났었다. 온라인 상으로는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으나 얼굴을 맞대고 보기는 그 날이 처음이었다. 역자 사인을 받을 요량으로 책장에 꽂혀 있었던 이 책을 구입했었다. 둘이서 청계천변을 거닐며 얘기가 통하는 걸 느낀 후 영광스런 마음으로 허선생님의 서명을 받은 것이 지금까지 속표지에 남아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기록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각별한 인연이 있는 책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간 단숨에 읽을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생각날 때마다 한 사람의 위대한 등반가를 만나서 그의 속내를 알고 싶은 마음에 정독할 수 밖에 없었다. 등반가들마다 지니고 있는 독특한 사상이나 생각들이 있어서 각기 다른 책 17 권을 읽는 듯한 깊이가 느껴졌기 때문에 천천히 오래도록 읽혔던 것 같다.
최근에 이 책을 다시 집어들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스포츠클라이밍에 대한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책 속의 등반가들이 거의 모두 뛰어난 알파인 등반가들이지만 중후반부에 나오는 제프 로우, 카트린 데스티벨, 패터 크로프트, 볼프강 궐리히, 린 힐, 토모 체슨 등에 관한 얘기는 스포츠클라이밍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나의 견해를 바꿔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공감하는 바가 크고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자유등반가들은 자유등반만이 최고라 생각하고, 알피니스트는 알파인 등반이 최상이라 여기며, 무엇이 가장 어려운 등반 행위인가에 대해 서로 논쟁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여겼던 토모 체슨의 생각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8천 미터 고도에서 어렵고 새로운 루트들을 등반하면서도 5.14 등급의 암벽등반을 모두 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것이 올해 제 꿈입니다."라고 말했던 체슨은 인공암벽에서의 등반경기에 참가하기도 하면서 그걸 좋아했다고 한다.
나는 영어 단어 "beyond"가 좋다. 사전적으로 "~을 넘어서, ~이상으로, ~이후"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이 단어는 항상 보여지는 것 이면의 진실이 있음을 각인시켜 준다.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또는 "저 오솔길을 돌아가면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라는 본능적인 궁금증을 "beyond"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 '위험의 저편에(Beyond Risk)'는 참 잘 지은 듯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산을 오르는 등반가들의 생각과 사상, 심리 상태를 가감 없이 전달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등반가들은 위험 자체를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체력과 기술적인 면 뿐만 아니라 지식과 정신적인 면에서까지 치밀하게 훈련하고 준비함으로써 극한의 위험에 대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책 속의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만났던 위대한 등반가들을 만나고 싶을 때 언제라도 책을 다시 펼쳐 들면 된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발터 보나티, 쿠르트 디엠베르거, 리카르도 캐신, 에드먼드 힐러리, 워랜 하딩, 라인홀트 메스너, 잰크라우드 드로여, 로얄 로빈스, 크리스 보닝턴, 제프 로우, 더그 스코트, 보이텍 쿠르티카, 카트린 데스티벨, 패터 크로프트, 볼프강 궐리히, 린 힐, 토모 체슨, 이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등반가들이다. 개인적으로는 허선생님의 경상도식 말투가 배어 있는 번역이 가끔 눈에 띄어 저절로 미소 지었던 것도 책 읽는 동안 깨알 같은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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