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한승원이 쓴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

빌레이 2013. 12. 15. 22:20

"지도를 펼쳐 놓고 영산강을 보면, 한겨울철의 잎사귀 모두 잃어버린 노거수 같다. 어머니 바다인 목포만에 뿌리를 묻은 그 노거수는 무안 땅, 함평 땅, 영암 땅, 나주 땅, 광주 땅, 장성 땅, 담양 땅으로 굵은 줄기들과 무수한 가는 줄기들을 뻗고 있다. 그 가지들 사이사이에 내가 읽은 이런저런 인문학적인 사건들과 혁혁한 인물들과 신화와 전설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어 있다.

  그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영산강은 담양, 장성, 광주, 나주, 영암, 함평, 무안에 실뿌리와 굵은 뿌리를 뻗은 채 목포 앞바다로 굵은 줄기를 치켜든 거대한 나무 같다. 강이 나뭇가지로도 보이고 뿌리로도 보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주의 모든 형상들은 닮는다는 것이다."

 

혜화동의 헌책방 같지 않은 중고도서 판매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주저없이 사들고 온 건 순전히 위 구절 때문이다. 책 말미에 있는 "강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바이올린처럼 노래하며 흐른다"란 제목의 작가 후기 중 일부인 이 구절은 한승원이란 작가의 신뢰성과 함께 나를 곧바로 끌어당겼다. 영산강은 내 고향 나주의 젖줄이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많이 그 강을 보면서 자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산강에 대해서 뭘 좀 아는 건 아니다. 나주시와 영산포를 흐르는 영산강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았을 뿐이다.

 

영산강의 지천인 동네 앞 시냇물에서 멱감고 물고기 잡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젊은 시절에 읽었던 문순태의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의 배경이 영산강이었으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내가 대학시절 학회지에 발표했던 단편소설의 모티브가 풍요로운 나주평야 위를 쓸쓸하게 흘러가는 한겨울의 영산강이었다는 정도가 나에게 남아 있는 영산강에 관한 기억의 편린들이다. 그런데 이 책은 영산강 전체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작가의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으로 풀어낸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알고 있던 미천한 지식의 조각들이 익숙한 지명 속에 녹아들어 마치 퍼즐 맞추기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한 재미가 느껴졌다.

 

작가는 영산강 본류와 지류들이 합류하는 것을 두 강줄기가 몸을 섞는 것으로 표현한다. 장성 땅을 흘러온 황룡강과 용추산 가마골에서 발원하여 담양 땅을 적셔온 영산강은 광주시 광산구에서 합류하게 되는데, 나는 이 합수 지점을 명절 때면 가끔 지나게 된다. 나주의 고향집에서 광주의 처갓집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영산강이 이 곳에서부터 "비로소 하얀 물너울의 질펀한 면모를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두 강줄기가 몸을 섞어 큰 강이 되는 것과 유사하게 위대한 학자들이 만남과 소통을 통해 서로의 학문적 깊이를 더해가는 일화들은 특별히 흥미롭다.

 

장성의 월봉서원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선비들의 학문적 교류는 특별히 멋스럽다. 아버지의 벗이 멀리서 방문했을 때 한양으로 출타 중인 아버지 대신 그 벗을 모시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세대를 초월한 학문적 친구가 된다는 얘기는 정말 아름답다. 고봉 기대승과 퇴계 이황이 편지로 주고받은 뜨거운 논의, 기대승과 송순의 사제지간을 떠난 학문적 정진,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의 나이와 종교를 뛰어 넘은 학술적 교류, 친구가 된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인연 등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루지 못할 사랑과 신뢰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현대 문명만 발달하고 문화와 학문적 깊이는 진일보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시대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고상한 아름다움과 행복감을 그들은 맛보았을 것이란 생각에 은근히 부럽기까지 하다. 유유히 흘러가는 영산강 물줄기가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이, 우리네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위대한 선인들의 체취를 이 책 속에서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1.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누가 살까봐 얼른 챙긴다.

 

2. 고등학교 시절 국어책에 실려있던 시가 있어 반가웠다.

 

3. 눈 내리는 날 연구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한옥의 기와지붕이 책 속의 서원들을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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