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대면수업을 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스승의 날은 이제 그 형식조차 사그라들고 있는 듯하다. 내가 학생 시절이었던 과거의 스승의 날 행사는 좀 과한 면이 없지 않았다. 강단에 선 이후로도 부자연스런 스승의 날 행사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어색했었다. 그래서 올해의 스승의 날이 조용히 넘어가는 게 오히려 홀가분하고 편한 마음이다. 그래도 이 즈음이면 자연스레 나와 얽힌 사제지간의 정을 떠올리게 된다. 그제는 졸업해서 어엿한 직장에 취업한 제자들이 찾아와서 정담을 나누는 기쁨을 누렸고, 어제는 전화 상으로나마 은퇴하신 은사님의 근황을 여쭐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느 누구의 선생으로 불리기엔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한 점 투성이지만, 스승의 날이니 만큼 내게 주어진 소명이나마 성실히 잘 감당해 내자는 다짐을 새롭게 해보게 된다.
비가 예보된 토요일의 일기예보를 보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실내암장에서 같이 운동하는 클라이머들은 주말의 비 소식에 자신들의 등반 계획이 어그러졌다며 불만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요즘 체중이 줄어 부쩍 즐거워진 클라이밍을 자연암벽에서 즐길 수 없게 된 주말 날씨가 야속하기는 나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건 빨리 미련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획했던 암벽등반은 포기하고, 우중산행이 될지라도 북한산의 숲길을 걷는 산행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오전까지는 비가 잘 참아준 덕택에 아카시아와 찔레꽃 향기가 가득한 산길을 오래 걸을 수 있었다.
칼바위 능선으로 올라서 대동문을 거쳐 진달래 능선으로 내려오는 경로의 끝자락에서야 우산을 펼쳐들었다. 하산길 막바지부터는 장마철처럼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잔뜩 흐리기만 하고 비가 찔끔찔끔 내렸더라면 원래 세웠던 암벽등반 계획을 변경한 아쉬움이 남을 뻔 했는데, 시원하게 쏟아진 비가 오히려 더욱 반갑고 고마웠다. 우산과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벗삼아 서두르지 않고 빗속을 유유히 걷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북한산둘레길을 따라 국립재활원에서 산행을 마칠 때까지 은은하게 퍼진 그윽한 꽃향기는 내 코끝을 즐겁게 해주었다. 자연이 선물해준 최고급 향수와 함께 해서 한결 품격 있고 고급스런 도보여행을 다녀온 듯한 만족감에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감사함이 차올랐다.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다는 꼬마 자동차 붕붕처럼 내 속에도 기분 좋은 에너지가 솟구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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