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의 지루한 무더위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첫 아이가 태어나던 해라 기억이 생생한 1994년도의 혹독했던 더위와 자주 비교되는 요즘의 날씨다. 더위는 끝나지 않는데 여름 방학은 끝나간다. 다음 주부터 2학기 개강이다. 여름 방학 기간 내에 설악에 다녀오고 싶어서 친구들과 등반을 계획한다. 비선대 주변의 명봉들을 잇는 삼형제길 등반을 허가 받는다. 적벽의 날등을 올라서 하늘금을 타고 장군봉 정상까지 잇는 장쾌한 등반선이 마음에 들어 예전부터 오르고 싶었던 곳이다. 긴 등반 시간을 고려하여 새벽 3시에 서울을 출발한다.
삼형제길을 세 친구가 등반한다는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이른 아침 설악동을 출발하여 상쾌한 기분으로 어프로치에 나선다. 적벽 아래의 채송화 향기 루트 표시 주위에서 잠시 헤메이다 조금 내려와서 삼형제길 초입을 찾는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한 팀이 막 등반에 나서고 있어서 차분하게 마음 먹고 장비를 착용한다. 출발을 기다리면서 앞 팀의 진행 상황을 지켜본다. 근래에 보기 드문 만만디 등반이다. 첫 피치 확보점에 올라서서 앞 팀의 선등자를 올려다 본다. 삼형제길에서 벗어나 좀 더 어려운 루트인 채송화 향기를 등반하고 있다. 후등자들은 모두 힘겨워 하면서 갖은 인공등반 방법으로 겨우 겨우 올라가는 모양새다.
너무 느린 진행을 보이면서 길도 잘 못 잡은 앞팀 때문에 오늘 등반은 고생 좀 하겠지 싶다. 앞팀과는 겹칠 염려가 전혀 없는 개념도 상의 삼형제길 루트로 내가 선등한다. 확보점에 거의 도착하여 쌍볼트를 공유하겠다는 양해를 구해보지만 앞팀 사람이 허락해주지 않는다. 아래에 있는 분들은 자기 팀이 길을 잘 못 들었으니 우리 팀에게 먼저 가도 된다고 해서 내가 등반했던 것인데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협소한 확보점에 같이 있으면 안전에도 문제가 있겠다 싶어서 임시로 중간 확보점을 만들고 한참을 피치 중간에서 대기한다. 대기 중에 갑자기 요란한 낙석 소리가 들린다. 주먹보다 한참 큰 돌덩어리가 앞팀의 부주위로 내가 대기 중인 곳의 바로 옆으로 떨어진 것이다. 안전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위를 올려다 보면서 가능하면 오버행 아래 쪽으로 몸을 숨긴다.
중간 확보점에서 한 시간 가량을 지루하게 기다린 듯하다. 앞팀의 등반 속도는 굼뱅이보다 느리다. 아무래도 등반 실력에 비해 힘겨운 루트를 선택한 팀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 같다. 가까스로 앞팀의 라스트가 둘째 피치 확보점에 도착한 직후에 나도 피치를 마무리 한다. 대섭이와 은경이가 차례로 등반해서 세 사람이 확보점에 모여 등반을 계속 이어갈지를 상의한다. 초보자들이 많은 앞팀의 뒤를 계속 따르다 보면 피치마다 10분 등반하고 1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꼴의 등반이 불 보듯 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낙석 등의 위험 요소를 머리 위에 안고 등반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에 오늘 등반은 여기서 접기로 결정한다.
등반선이 멋지고 난이도도 우리 친구들에게 적당할 것 같은 삼형제길이라서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나중을 기약하기로 하고 채송화 향기 출발점으로 자일 하강하여 등반을 접는다. 설악산도 아직은 덥다. 비선대 위의 천불동 계곡으로 올라가 시원한 물가에서 점심을 먹으며 한참을 쉬었다가 내려온다. 적벽에서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삼형제길 루트를 멀리서나마 가늠해보면서 아쉬움을 달래본다. 조금 이른 오후 시간에 설악동의 숙소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야외 데크에 둘러 앉아 친구들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는다. 설악산 계곡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는 데크에 둘러앉아 고기 굽고 술 마시는 시간이 더이상 좋을 수가 없다. 시원한 캔맥주로 시작해서 독일에서 공수한 아스바흐 꼬냑, 안동소주, 상황버섯주, 산사춘 등이 이어진 술파티로 삼형제길 등반에 대한 아쉬움을 저멀리 날려버린다. 설악의 밤을 우리가 접수한 듯 길게 이어진 술자리에 친구들의 깊어가는 우정이 함께 한다.
간밤의 과음 탓에 모두들 힘겨운 중에도 새벽에 기상하여 속초 시내의 해장국집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장수대로 이동한다. 가랑비가 살짝 내리는 날씨와 그리 좋지 못한 몸 상태로 벽 등반은 무리라는 판단 하에 예정했던 미륵장군봉의 체게바라길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한다. 대신 해장 산행을 겸한 부담없는 몸풀기 등반 루트로 가까이에 있는 몽유도원도를 택한다. 어렵지 않은 몽유도원도길을 발이 아픈 암벽화를 신지 않고 릿지화만으로 소풍가듯 즐겁게 오르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피치 중간에 간간히 내리던 가랑비도 어느새 멈추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준다. 한계산성 릿지 사이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은 어느새 신선한 가을 냄새를 담고 있는 듯하다. 우리들 외에 아무도 없는 고요한 설악의 품 속에 안겨 있다는 것 자체가 평화로운 치유의 시간이다.
몽유도원도 루트 등반을 가볍게 마무리 하고 가파른 탈출로를 조심스레 내려온다. 석황사 계곡에서 탁족하며 올려다보는 하늘은 이미 가을빛이다. 협곡 아래에서 살펴본 설악은 벌써 내밀하게 가을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계리의 송어횟집에서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까지 먹고 서울로 돌아온다. 강원도에서 막바지 피서를 즐긴 행렬 때문에 교통체증으로 길이 좀 막혀도 설악에 다녀온 뿌듯함을 반감시키지는 못한다. 비록 계획했던 등반이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악우들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늦여름의 열기를 식히고 초가을의 신선함을 간직함으로써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던 1박 2일 간의 설악산 등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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