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길은 언제 가도 좋은 곳이다.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이 통과하던 새재길은 경북 문경에서 충북 괴산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계곡을 따라 나있는 새재길 우측은 주흘산에서 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고 맞은편 능선은 조령산에서 신선암봉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하늘금을 이루고 있다. 새재길 양편을 호위하는 무사들처럼 버티고 서있는 두 산줄기는 조령에서 만난다. 우리말로 새재인 조령엔 제3관문이 세워져 있다. 몇년 전 가을에 주흘산 주봉과 영봉에 올라 부봉으로 이어진 능선길을 따라 부봉1봉부터 6봉까지를 오르고 제2관문으로 하산하여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산행을 한 적이 있다. 벌써 4년이 흐른 2009년 10월 30일의 주흘산 산행 후에 졸작의 시처럼 남겨둔 메모를 조금 손질해본다.
수류화개(水流花開)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주흘산
걷고 싶던 문경새재길
가을날 새벽공기 가르며 찾아가네
여궁폭포 절벽미와 물줄기는 숨은 비경
팔부능선 대궐약수 나그네를 쉬어가게 하고
주흘산 주봉 다다르니 일망무제라
연무 낀 주위 풍경 고즈넉히 잠겼네
주흘영봉 정상지나 부봉에 이르는 오솔능선길
마음 편한 나그네길
여섯 봉우리 올망졸망 모여 있는 부봉 암릉길
오르내리는 그 길이 지루함 없어 좋아라
낙엽송 숲길에서 돌아본 우람한 부봉6봉
캐나디언 록키 마운틴 한자락을 닮았네
조령관 지나 주흘관에 이르는 새재길
드넓은 흙길이 귀가길 나그네의 마음마저 포근히 감싸주네
그 옛날 청운의 꿈 안고 상경하던 선비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아는 체 하며 눈인사 보내줄 듯하네
이 길을 지나는 난 무슨 꿈을 꾸려 하는가
결국엔 자연으로 돌아갈 이 몸
산하를 닮아 더욱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물 흐르 듯 꽃이 피듯 그렇게
옛 선비들처럼 멋진 시 한 수 남기고 싶었던 4년 전의 주흘산 산행은 다시 떠올릴 때마다 행복한 추억이다. 그때 산길을 거닐면서 시종일관 마주보였던 조령산과 신선암봉으로 이어지는 하늘금을 꼭 한 번 걸어보리라 마음 먹었었다. 최근에 우연히 월간 <산>지에 나온 산행기를 읽고 난 후 조령산에 가고 싶은 생각이 다시 찾아 들었다. 그 산행기에서 소개한 코스대로 따라서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대전 카이스트에 출장을 다녀온 다음날 새벽에 집을 나선다는 게 조금 부담스런 일이었으나 별로 게의치 않기로 했다. 내 차로 5시에 집을 나서서 친구들을 태우고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따라 문경새재 주차장에 도착한다. 제1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문경유스호스텔 뒤로 산행을 시작한 때는 8시가 채 못된 시각이다.
유스호스텔-기산-조령샘-조령산-신선암봉-928봉-깃대봉-조령(제3관문)-조곡관(제2관문)-주흘관(제1관문) 루트를 따라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원점회귀 산행이다. 유스호스텔에서 기산을 거쳐 조령샘에 이르는 구간은 아름드리 참나무 숲속을 걷는 호젓함이 있다. 단풍도 한창이다. 우리 외에는 다른 산객을 한 명도 만나지 않았을 정도로 한적해서 모처럼 자연의 품에 오롯히 안긴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반대로 조령샘은 시끌벅적이다. 이화령에서 올라온 단체 산객들이 쉬어가기에 알맞은 곳이라 그런지 넓은 공터에 쉴 장소 찾기가 마땅치 않을 정도다. 조령샘에서 30여 분 거리에 조령산 정상이 있다. 주말 산행을 즐기는 많은 인파로 인해 정상석에서 기념사진 찍기가 힘들 정도로 북적인다.
조령산을 내려서서 신선암봉에 이르는 구간은 오르막과 내리막 급경사가 반복되는 험로이다. 다시 호젓해진 산길을 걷는 즐거움은 있으나 너무 자주 나타나는 고정 로프가 신경에 쓰인다. 신선암봉 정상에서는 928봉으로 거쳐 깃대봉에 이르는 능선길과 새재길 건너에 자리한 암봉인 부봉이 멋진 조망을 선사한다. 여전히 계속되는 고정 로프에 의지해 능선길을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어느새 산길은 순해진다. 깃대봉 정상에 다녀온 후 제3관문 방향으로 하산한다. 관문에 내려서기 직전의 숲은 단풍으로 불타고 있다. 제3관문부터 시작되는 드넓은 흙길의 새재길은 장시간의 산행에 뜨거워진 발바닥과 뻐근해진 무릎을 달래주기에 안성맞춤이다.
새재길 양편 숲을 형형색색으로 불태우고 있는 단풍은 정말 아름답다. 무대를 비추는 화려한 조명처럼 새재길 양쪽을 수놓고 있다. 피곤함도 잊은 채 물살을 따라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나뭇잎처럼 단풍 숲 사이를 유영하듯 빠져나온다. 제2관문을 지나 어둑해지기 시작한 주변은 제1관문을 통과할 즈음 깜깜한 어둠에 잠긴다. 랜턴도 꺼내지 않고 친구들과 산책하듯 담소 나누며 어둠 속을 걸어내려오니 어느새 식당가의 불빛이 우리를 반긴다. 많은 식당이 재료가 바닥나 식사할 수 없다는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낮시간 동안 대단히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간 모양이다. 식사가 가능한 식당을 겨우 찾아내어 고추장삼겹살 석쇠구이와 더덕구이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아름다운 단풍에 취해 사진 촬영한 시간이 조금 길게 소요되긴 했지만 10시간 넘게 20여 킬로미터의 산길을 걸었다. 험한 바윗길 구간이 많았고 부드러운 오솔길도 있어서 걷는 재미가 좋았다. 산행 거리에 비해 시간이 길게 걸리는 산길이다. 황홀하게 불타오르는 단풍과 선선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 탓인지 가을을 온전히 즐겼다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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