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트레킹

늦봄 비에 젖은 월출산에 오르며 - 5월 17일

빌레이 2009. 5. 26. 09:15

새벽 다섯 시, 고향집 대나무숲의 새소리에 잠이 깬다.

간밤 아버지 제사를 마친 식구들은 모두 꿈속을 헤매고 있다.

밖으로 나오니 아직 가랑비가 내린다. 잠시 망설이다 간단히 챙겨 월출산으로 향한다.

 

집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인 천황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으로 향한다.

우리나라 바위산의 계곡은 비온 직후에 가장 멋지다.

바람폭포 계곡에 들어서니 곳곳이 폭포다. 유량이 풍부하고 물살이 세차다.

이끼폭포에서 느린셔터로 몇 컷을 찍어본다. 그림이 만족스럽다.

 

평소엔 바람처럼 날리던 바람폭포 물줄기도 폭포의 위용을 되찾았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산속에 물소리만 세차다. 이 모두를 온전히 내가 가진 듯한 기분이 든다.

바람폭포 위부터는 짙은 안개속이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생각한다.

육형제바위에서 바라보는 장군봉 능선이 멋진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통천문 바위벽엔 물기 머금은 철쭉이 예쁘다. 천황봉의 넓은 바위 마당도 조용하다.

 

구름다리 쪽으로 하산하니 산객들이 하나둘 올라온다. 사자봉도 구름 속에 숨었다.

맞은편 교각이 보이지 않는 구름다리는 정말 구름 속에 놓인 다리 같다.

세 시간이 조금 넘은 월출산 새벽 산행 동안 많은 것을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엄마 손 잡고 유두날 물맞으러 왔던 월출산 계곡을 생각했다.

중학교 때 보이스카웃 캠핑하며 랜턴도 없이 어두운 산길을 걸어 형들 심부름 하던 것을 생각했다.

구름다리 오르며 처음으로 보았던 대학생 형들의 암벽등반 모습과 까마득한 바위턱에 걸터앉은 여대생을 생각했다.

아내와 함께, 동생과 함께, 가족과 함께, 캐빈과 함께 오르던 월출산을 생각했다.

내 마음의 고향 같은 월출산이 항상 거기 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