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노백인 도전 - 2025년 5월 4일(일)

빌레이 2025. 5. 5. 09:47

언젠가부터 너무 편안하고 게으른 등반에 물들어 있었다. 본업이 아닌 취미로 하는 등반이나 산행이 굳이 힘겨울 필요까지 있겠냐 하는 나태한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어프로치 가까운 암장에서 볼트 간격이 촘촘한 단피치를 오르내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의 알파인 등반 능력은 서서히 퇴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허리와 무릎 관절이 아파오고 아랫배는 튀어 나오는 노화의 자연법칙 역시 나를 피해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주변 여건을 더이상 도전적인 등반은 하지 않겠다는 핑계거리로 이용하고 있는 비겁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정신까지 늙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하면서 위대한 등반가들의 모험적인 등반기에 감동하고 그들의 행위를 동경해 마지 않던 젊은 날의 패기를 조금이나마 되찾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다.

 

기범씨가 올린 하루에 노적봉, 백운대, 인수봉 정상을 모두 밟는 '노백인' 등반 공지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참가 댓글을 다는 데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봄시즌부터 수요등반을 거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직은 내 체력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갑인 승호씨와 나보다는 한참 선배인 김선생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여 나도 용기를 내보기로 마음을 다졌다. 현재의 내게는 다소 도전적인 등반이 틀림 없으므로 그저 민폐만 끼치지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준비 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반신반의했던 내 몸상태는 끝까지 잘 버텨 주었다. 바위에 붙어서 등반하는 매 순간이 즐거웠으나, 나만 로프를 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등반지 사이를 이동할 때가 제일 힘들었다. 아직까지 내 몸은 신속한 이동을 위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뼈저리게 인식해야만 했다. 

 

아침 6시 반에 도선사광장주차장을 출발하여 노적봉을 정코스로 올라 정상을 밟은 시각은 오전 10시 직전이었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인 백운대 정상으로 향하는 남벽의 모든 바윗길이 만원이었다. 우리는 대안으로 '녹두장군길' 우측 직벽에 있는 무명의 크랙 루트를 등반한 것에 만족하고, 곧장 인수봉으로 향했다. 인수봉 서면의 '천방지축' 루트를 강풍 속에서 올라 라스트를 맡으신 김선생님까지 정상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하강까지 순조롭게 마친 후의 만족감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안일하고 편안한 등반에 길들여져 있던 나의 도전의식을 일깨울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소득이었다. 리더인 기범씨의 현명하고 안정감 있는 진행 덕택에 오늘의 노백인 등반은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행위가 아닌, 줄을 묶은 악우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아름다운 도전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 [06:42], 도선사광장주차장에서 06시 30분에 출발, 도선사에서 용암문으로 향하는 등로에 접어들었다.
▲ [07:12] 내가 꼴찌로 용암문에 도착.
▲ [07:40] 노적봉 하단 등반 출발지점에 도착.
▲ [08:13] 노적봉 등반 출발.
▲ 첫 피치는 보기보다 미끌리는 슬랩. 응달에 습기까지 머금은 바위면.
▲ [08:38] 4인 모두 첫 피치 등반 완료.
▲ [08:38] 선등자인 기범씨, 2피치 등반 완료.
▲ [09:03] 기범씨가 '반도A길' 3, 4, 5 피치를 단 번에 선등 완료.
▲ 나와 승호씨가 동시 등반으로 5피치 등반 중. 세 피치를 단 번에 오르느라 힘 좀 들었다는...
▲ 확보점에 쎄컨과 써드가 거의 동시에 도착하자마자 선등자와 라스트가 곧바로 출발하는 등반 시스템. 피치 상에서 항상 두 명이 동시 등반하는 스피드 등반.
▲ [09:29] 선등자인 기범씨가 '반도A길' 6, 7피치를 단 번에 올라 초원에 도착.
▲ [09:41] 나와 승호씨가 초원 옆의 7피치 확보점에 도착.
▲ [09:58] 마지막 2피치를 단 번에 올라서 나와 승호씨가 노적봉 정상에 도착.
▲ 노적봉 정상에서 백운대 남벽 코스를 살펴보는 기범씨.
▲ 노적봉 정상에서 바라본 백운대와 인수봉. 노백인 3봉 정상이 나란히 보인다.
▲ 노적봉 정상에서의 여유로운 휴식 시간.
▲ 만경대 우회로에서 바라본 백운대 남벽. 정상으로 향하는 '신동엽길', '김개남 장군길', '녹두장군길' 모두 등반자들이 많았다.
▲ '신동엽길'은 일치감치 포기했는데, '녹두장군길' 출발점에도 많은 대기자들이 있었다.
▲ '김개남 장군길'도 이제 막 선등자가 첫 피치를 등반하고 있는 중이었다.
▲ [11:46] 고심 끝에 '녹두장군길' 우측의 무명길을 등반하기로 결정하고 출발.
▲ [12:00] 위쪽에 쌍볼트만 살짝 보이고 중간 볼트는 전혀 없는 직상크랙 구간을 올라서 1피치 선등 완료.
▲ 등반 흔적이라곤 발견할 수 없었던 야생의 크랙을 오르는 모험심 가득했던 등반이었다.
▲ 우리가 두 피치로 올랐던 등반라인을 대충 그려보았다. 2피치 너머는 백운대를 오르는 일반 등로이다.
▲ 하강한 후에 강풍 수준으로 변한 바람을 피할 수 있었던 안부에서 점심시간을 가졌다.
▲ [14:06] 인수봉을 향해 출발.
▲ 위문을 통과하여 백운산장을 거쳐 인수봉 서면으로 이동 중.
▲ [14:48] 인수봉 '천방지축' 루트 출발.
▲ 강풍에 몸이 휘청거리고 초크백이 거꾸로 흔들리는 등 정신 없는 상황에서 어려운 슬랩 구간을 오르는 것이 만만치가 않았다.
▲ [15:57] 내가 쎄컨으로 인수봉 정상에 도착한 순간.
▲ 라스트를 맡으신 김선생님께서 승호씨의 확보로 인수봉 정상을 밟는 순간.
▲ [16:04] 모든 팀원이 인수봉 정상에 도착한 순간의 환희.
▲ [16:51] 강풍 속에서 안전하게 하강을 마치고 천천히 하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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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김선생님 카메라에 담긴 장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