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너무 편안하고 게으른 등반에 물들어 있었다. 본업이 아닌 취미로 하는 등반이나 산행이 굳이 힘겨울 필요까지 있겠냐 하는 나태한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어프로치 가까운 암장에서 볼트 간격이 촘촘한 단피치를 오르내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의 알파인 등반 능력은 서서히 퇴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허리와 무릎 관절이 아파오고 아랫배는 튀어 나오는 노화의 자연법칙 역시 나를 피해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주변 여건을 더이상 도전적인 등반은 하지 않겠다는 핑계거리로 이용하고 있는 비겁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정신까지 늙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하면서 위대한 등반가들의 모험적인 등반기에 감동하고 그들의 행위를 동경해 마지 않던 젊은 날의 패기를 조금이나마 되찾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다.
기범씨가 올린 하루에 노적봉, 백운대, 인수봉 정상을 모두 밟는 '노백인' 등반 공지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참가 댓글을 다는 데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 봄시즌부터 수요등반을 거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직은 내 체력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갑인 승호씨와 나보다는 한참 선배인 김선생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여 나도 용기를 내보기로 마음을 다졌다. 현재의 내게는 다소 도전적인 등반이 틀림 없으므로 그저 민폐만 끼치지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준비 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반신반의했던 내 몸상태는 끝까지 잘 버텨 주었다. 바위에 붙어서 등반하는 매 순간이 즐거웠으나, 나만 로프를 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등반지 사이를 이동할 때가 제일 힘들었다. 아직까지 내 몸은 신속한 이동을 위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뼈저리게 인식해야만 했다.
아침 6시 반에 도선사광장주차장을 출발하여 노적봉을 정코스로 올라 정상을 밟은 시각은 오전 10시 직전이었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인 백운대 정상으로 향하는 남벽의 모든 바윗길이 만원이었다. 우리는 대안으로 '녹두장군길' 우측 직벽에 있는 무명의 크랙 루트를 등반한 것에 만족하고, 곧장 인수봉으로 향했다. 인수봉 서면의 '천방지축' 루트를 강풍 속에서 올라 라스트를 맡으신 김선생님까지 정상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하강까지 순조롭게 마친 후의 만족감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안일하고 편안한 등반에 길들여져 있던 나의 도전의식을 일깨울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소득이었다. 리더인 기범씨의 현명하고 안정감 있는 진행 덕택에 오늘의 노백인 등반은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행위가 아닌, 줄을 묶은 악우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아름다운 도전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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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김선생님 카메라에 담긴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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