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북한산 노적봉 '써제이길' - 2025년 4월 26일(토)

빌레이 2025. 4. 27. 08:19

노적봉 등반을 위해 택시에서 하차하여 도선사 바로 아래의 데크로 이동한다. 어프로치에 맞게 짐을 다시 꾸리면서 별안간 내 휴대폰이 없어진 걸 확인한다. 우선 도선사 경내에 있는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하자며 마음부터 다잡는다. 악우의 전화기로 내 휴대폰에 계속 연락해 보지만 전혀 응답이 없다. 찬찬히 되짚어 생각해 본다. 우이동에서 도선사주차장을 오가는 택시 안에 떨어뜨린 게 분명하다는 판단이 선다. 도선사주차장의 회차 지점으로 되돌아 가서 올라오는 택시를 차례대로 붙잡고 기사님께 문의해 보기로 한다.

 

우이동에서 올라오는 택시를 기다리던 중 K등산학교 강사로 봉사 중인 기범씨를 만나 내 휴대폰에 다시 연락해 보지만 여전히 무응답이다. 다행스럽게도 네 번째로 올라오는 택시에서 내 휴대폰을 들고 있는 기사를 만난다. 그런데 택시기사가 대놓고 사례금을 요구한다. 조금 어이가 없어서 내가 택시를 탔을 때, 정원 초과로 불편하게 돌아앉느라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빠졌다는 걸 항의하니 그냥 가라고 한다. 순간적으로 돈에 찌든 각박한 세상의 일면을 들여다 본 후의 씁쓸함이 밀려온다.

 

산에 들기 전에 벌어진 황망하고 불쾌한 일들은 휴대폰을 되찾은 것으로 위안을 삼고 모두 잊기로 한다. 용암문으로 향하는 산길로 접어드니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연초록 빛깔로 물들어 가는 신록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복잡한 심사가 정리되는 기분이다. 천천히 산길을 오르던 중 악우의 몸상태가 급격히 나빠진다. 용암봉이 올려다보이는 바위턱에서 에너지젤과 행동식을 섭취하면서 한참을 쉬기로 한다. 산행 직전에 발생한 께름칙한 해프닝도 있고 해서 하산을 결정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악우가 어느 정도의 회복세를 보인다. 원래 염두에 두었던 '경원대길'이나 '광클사랑' 루트는 제쳐두고, 상대적으로 어프로치가 짧고 부담이 덜한 '써제이길'로 등반지를 바꾸기로 결정한다. 악우가 메고 오르던 로프는 내가 둘러메기로 한다. 

 

어프로치 전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써제이길' 등반은 무사히 잘 끝났다. 선등한 나의 몸상태도 그리 좋은 건 아니어서 평소보다는 동작이 굼뜨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우리팀 외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바윗길이 등반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었다. 시종일관 선글라스를 착용해 할 정도의 밝은 햇살 속에서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었으나, 등반에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내심 걱정하던 악우의 몸상태도 정상까지 잘 버텨 주었다. 여섯 피치로 끊어서 오른 노적봉 정상에서의 점심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하고도 소중한 순간이었다. 우리네 일상에서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착착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늘처럼 예기치 않게 일이 꼬인 경우에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하는 성경 구절처럼 결국엔 만족스런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 신록의 숲에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 지난 겨울의 습설로 인해 쓰러진 산벚꽃 나무에도 봄꽃이 피었다.
▲ 용암봉이 올려다보이는 바윗턱에서 한참을 쉬었다. 악우의 몸상태가 나빠져서 하산을 결정해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 원래 염두에 두었던 루트들보다 어프로치가 짧고 부담이 덜한 '써제이길' 첫 피치를 오르고 있다.
▲ '써제이길' 2피치 등반선.
▲ '써제이길' 2피치 확보점. 우측에 쌍볼트가 새롭게 설치된 듯하다.
▲ 새로운 2피치 확보점을 사용하면, 3피치 출발이 자연스럽다.
▲ 4피치 초반부를 오르고 있다. 크랙에서는 몸이 밖으로 나와야 자세가 안정적인데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몸놀림이었다.
▲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 가장 까다로웠던 4피치 등반 라인.
▲ 5피치부터는 익숙한 바윗길이라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 캠을 충분히 챙겨 온 것이 중간 볼트가 거의 없었던 오늘 등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4피치 확보점에서 우측으로 바라 본 풍경. 우측 페이스의 녹슨 볼트를 보면서 이 곳을 등반한 팀을 구경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만경대 능선을 오르는 이들이 많이 보였다.
▲ 6피치 초반부의 슬랩에서 홀드와 동작을 잘 찾은 것이 조그만 만족감을 주었다.
▲ 첫 볼트를 올라서서 둘째 볼트에 클립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사진 속의 발홀드를 손으로 잡고 맨틀링 비슷한 동작으로 일어서야 한다. 그 다음은 우측 한 시 방향의 살짝 패인 손홀드를 누르고 일어서면 된다.
▲ 노적봉 정상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의 기쁨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 평소의 주말답지 않게 노적봉 정상엔 아무도 없었다.
▲ 한적한 정상에서 사진 찍기 놀이를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 정상 주변엔 진달래꽃이 절정이었다.
▲ 바위 틈새로 보이는 백운대를 배경으로...
▲ 노적봉 정상에서 보는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삼각 봉우리는 언제 봐도 절경이다.
▲ 하산길도 여유만만으로 천천히...
▲ 발을 담그고 10초를 버티기 힘들 정도로 계곡물이 얼음물처럼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