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종일 적잖은 봄비가 내렸다. 오늘 약속된 수요등반이 취소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날씨였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반가운 햇살을 받으며 도선사주차장에서 일행들을 기다리는 중에도 사방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범씨는 하루재를 넘어가서 인수봉의 상태를 보고 오늘의 등반코스를 결정할 것이라 했다. 암벽의 물길마다 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하고 크랙도 젖어 있을 게 뻔해 보였다. 대슬랩 좌측의 '오이지슬랩' 한 피치를 오르는 것으로 오늘 등반을 시작했다. 빤빤하고 짭짤한 슬랩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일인데도 많은 클라이머들이 속속 대슬랩으로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오아시스로 이동하여 간단히 챙겨서 '의대길'에 붙었다.
나로서는 참 오랜만의 의대길이다. 구선생님의 동문산악회에서 개척한 길을 구선생님과 함께 올라서 더욱 뜻깊은 순간이었다. 기범씨가 70미터 로프 두 동을 달고 의대길 1~3피치를 단 번에 오르고, 그 뒤로 나와 구선생님이 거의 동시에 등반했다. 미끄러운 2피치 사선크랙에서는 보기 좋게 추락 한 번 먹고, 3피치 볼트따기 구간에서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귀바위 코밑의 테라스에서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우리 셋만의 여유로운 커피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조망과 기분 좋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주는 가운데 모카포트에서 갓 추출하여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기범씨표 커피와 내가 어설프게 만든 오트밀건강빵이 꽤나 잘 어울렸다. 그야말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달콤한 휴식시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지상 최고의 카페가 바로 그 곳이었다.
의대길 종착점인 귀바위 정상도 오랜만에 밟아 보았다. 오아시스로 하강한 후에 또 한 차례의 커피타임을 가졌다. 다른 팀들이 모두 내려간 후에 우리팀만 남아 있어서 사방이 고요한 시간이었다. 인수봉 암벽에 자리한 오아시스란 명칭에 걸맞는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연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한 봄숲을 바라보면서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은 귀바위테라스 카페에서의 휴식과는 또다른 편안함이 있었다. 오후들어 물기가 많이 마른 것을 확인한 기범씨는 '영(zero)'길에 줄을 걸었다. 저녁 약속이 잡혀 있던 구선생님은 '영'길을 등반한 다음 곧바로 귀가하시고, 기범씨와 나는 오아시스의 편안함을 좀 더 만끽하다가 내가 '영'길을 한 판 오른 후에 하강하는 것으로 오늘의 등반을 마무리지었다. 청명한 하늘, 새싹의 싱그러움, 화사한 봄꽃, 깨끗한 바위, 모든 환경이 최고였던 인수봉에서 마음 통하는 악우들과 함께 노닌 하루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암빙벽등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산 노적봉 '써제이길' - 2025년 4월 26일(토) (0) | 2025.04.27 |
---|---|
[정우씨 환영등반] 인수봉 - 2025년 4월 16일(수) (1) | 2025.04.17 |
인수봉 - 2025년 4월 9일(수) (0) | 2025.04.11 |
수락산 대주암장 - 2025년 4월 6일(일) (1) | 2025.04.07 |
수락산 내원암장 - 2025년 4월 2일(수) (0) | 2025.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