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원주 칠봉암장 - 2021년 5월 19일(수)

빌레이 2021. 5. 20. 06:10

내가 칠봉암장에 처음으로 왔던 날은 가을이 한창 깊어가던 작년 10월 24일이었다. 그때는 암벽에 붙은 첫 동작에서 극심한 허리통증이 유발되어 클라이밍은 전혀 하지 못하고 칠봉유원지 주변과 문바위봉의 산길을 천천히 산책하는 것으로 허리통증을 달래며 하루를 보내야만 했었다. 나에게는 그리 유쾌할 리 없는 칠봉암장에서의 첫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바꾸고 싶다는 소망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트라우마나 징크스는 가능하면 빨리 극복해서 이겨내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클라이밍에서도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근 7개월만에 다시 찾은 칠봉암장에서 보낸 오늘 하루는 모든 면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함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소망을 몇 배로 보상받은 듯한 그런 감사함이었다. 7봉과 7개월의 기다림, 럭키 쎄븐 두 개가 겹친 행운이 따랐을 것이라는 말장난으로 자의적인 해석까지 하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장맛비처럼 월요일까지 3일 내내 이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수요일이지만 부처님 오신 날이라 공휴일인 오늘은 모처럼 온종일 화창한 날씨일 거라는 예보로 등반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했다. 평소 실내암장에서 같이 운동하는 악우들 4명이 내차에 동승하여 새벽 6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원주시 호저면에 위치한 칠봉암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실내암장에서 가끔 눈인사만 나누던 송화씨가 자연암벽에서의 등반에 처음으로 함께 했다. 칠봉암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우리팀은 등반하기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춘 암벽에서 늦은 오후시간까지 열심히 매달린 후, 섬강 지류인 일리천변에서 미리 준비해간 음식으로 간단히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서울로 귀환했다. 순수한 우정이 넘치는 악우들과 함께한 행복 가득한 시간이었던 까닭에 육체적으로는 다소 빡셌던 오늘 하루였지만, 일말의 피곤함도 남지 않았다.          

 

▲ 7개월만에 두 번째로 다시 찾은 칠봉암장에 붙는 감회가 남달랐다. 
▲ 호젓한 2차선 도로변에 위치한 칠봉암장은 접근성이 최고로 좋다. 우리팀이 오늘 암장의 첫 손님이 되었다. 
▲ 어느 암장이든 첫 등반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범이(5.10a, 23m)' 루트를 오르는 것으로 칠봉암장에서의 클라이밍을 시작한다. 
▲ 마음의 부담감을 떨쳐내고 '범이' 루트를 완등한 순간이 내심 기뻤다. 온사이트 완등.
▲ 곧이어 '범이' 바로 좌측의 '곰이(5.9, 13m)' 루트는 톱로핑 방식으로 맛을 본 후, '범이' 우측의 '현주(5.10b, 18m)' 루트에 붙었다.  
▲ 몸이 풀린 덕택인지 '범이(5.10a)'보다 오히려 더 쉽게 '현주(5.10b)'를 완등하고 나니 내심 자신감이 생겼다. 온사이트 완등.
▲ 여세를 몰아서 '지각생(5.10c, 24m)' 루트에 도전했다.
▲ 크랙을 따라 이어진 등반선이 자연스러운 '지각생' 루트는 후반부의 오버행을 돌파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 '지각생' 루트 후반부의 좌향 크랙에서 우측의 칸테로 올라타는 구간이 하일라이트였다. 기분 좋게 온사이트 완등. 
▲ 기범씨가 '늦뫼(5.11a, 20m)' 루트를 오르는 동안 내가 선등자 빌레이를 보고 있다. 이때부터 기온이 올라가서 바지 밑단을 걷어 올렸다.
▲ 전문 클라이머인 기범씨의 등반 자세는 언제봐도 멋지다.
▲ 오전 등반의 마지막 순서로 '늦뫼' 루트를 톱로핑 방식으로 올랐다. 크럭스 구간에서의 동작은 풀었으나 5.11대 난이도를 선등하기엔 손가락 힘과 완력이 부족하여 아직은 버겁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 점심시간에 최근 새로 완성된 좌벽을 둘러보았다.
▲ 좌벽이 완성되어 칠봉암장의 루트 개수는 이제 33개로 늘었다.
▲ 암장을 개척하신 분들의 애정어린 노고가 안내도에도 깃들어 있는 듯하다. 다음에 온다면 좌벽의 루트들도 올라볼 것이다. 
▲ 칠봉암장은 내가 오르고 싶은 특색있는 루트들이 많아서 앞으로도 자주 올 듯한 예감이다. 
▲ 암장을 찾는 이들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에티켓을 적어 놓은 안내판의 내용은 모든 클라이머들이 항상 마음 속에 새겨야 할 덕목이다.  
▲ 오늘 등반에서 가장 큰 만족감을 안겨주었던 '지각생' 루트 앞에서 포즈를 취해봤다. 밥벌이에 관련된 일이나 약속에서의 지각생은 용서할 수 없겠지만, 자유함을 추구하는 클라이밍에서 지각생이면 어떤가? 앞으로도 차근차근 천천히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잃지 말자는 다짐을 해보았다.  
▲ 오후 등반은 '왜 안오시나요(5.10a, 15m)'부터 시작했다.
▲ '왜 안오시나요(5.10a, 15m)' 루트는 식후의 노곤함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무난하게 온사이트로 완등했다.
▲ '여우똥꼬새(5.10b, 15m)' 루트는 중간에 루트를 잘 못 읽는 바람에 아쉽게도 온사이트 완등엔 실패했다.
▲ 온사이트 완등에 실패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여우똥꼬새' 루트를 톱로핑 방식으로 한 차례 더 올랐다.
▲ 좌측에서는 모모가 '여우똥꼬새' 루트를, 그 바로 우측에서는 기범씨가 '오만십만(5.11c, 19m)' 루트를 각각 선등 중이다. 
▲ 톱로핑 방식으로 붙어본 '오만십만' 루트는 오버행을 올라서기 전부터 밸런스 잡기가 무척 까다로웠다.
▲ 모모가 등반 중인 '오만십만'의 오버행 위 구간도 홀드가 작아서 파워 넘치는 손가락 힘이 필요했다. 
▲ '엔티이노베이션(5.10b, 18m)' 루트는 첫 볼트를 넘어서는 오버행 구간이 생각보다는 어려웠다. 첫 볼트 이후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오버행을 넘어설 때의 완력이 부족하여 온사이트 완등엔 실패했다.
▲ 기범씨가 등산학교 제자인 송화씨의 확보를 받으며 '나홀로 대박(5.12b, 9m)' 루트에 도전하고 있다.
▲ '엔티이노베이션' 루트의 크럭스 구간인 출발 직후의 오버행 벽은 5.10b 난이도는 넘는 듯했다. 내가 등반했을 때 사진 속의 모모가 잡고 있는 오른손 홀드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었다. 
▲ 오늘 초보 클라이머답지 않은 몸놀림을 보여준 송화씨가 '엔티이노베이션' 루트의 초반 오버행 구간에 붙어있다. 
▲ 기범씨는 첫 번째 시도에서 아쉽게 후퇴했던 '나홀로 대박(5.12b)' 루트를 매끄러운 동작으로 완등하는 데 성공했다.
▲ 오늘의 마지막 루트로 '치악2(5.10c, 10m)'에 도전했다.
▲ '치악2' 루트의 오버행 구간을 처음엔 돌파하지 못하여 아쉽게 온사이트 완등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 번 쉰 후에 올라설 수 있었다. 
▲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라서 그랬는지 '치악2' 루트에서는 크럭스인 첫 볼트를 넘어선 이후 구간에서도 집중력이 필요했다. 등반할 때 손홀드가 미덥지 않을 땐 발에서 해답을 찾으라는 기범씨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 서쪽으로 해가 기울어 시원한 산그늘이 내려 앉은 산현암장 앞의 일리천변에서 많은 이들이 캠핑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여기서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경길에 올랐다. 엊그제 3일 동안 장맛비처럼 내린 비로 강물이 풍부해진 일리천은 섬강의 지류이고, 섬강은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 모내기를 앞둔 논에 드리워진 산그늘처럼 평화로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가 더없이 소중한 추억으로 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