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파주 거인암장 - 2021년 5월 9일(일)

빌레이 2021. 5. 9. 20:39

일주일 전의 노적봉 등반에서 암벽까지의 접근 거리가 먼 멀티피치 등반이 아직은 온전치 않은 내 허리 상태에 큰 무리가 따른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앓고 있는 척추관협착증에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장시간 동안 산길을 오르내리는 것이 대단히 해롭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험 삼아 한 번은 내가 좋아하는 멀티피치 등반을 시도해 보고 싶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노적봉 등반을 다녀온 이후에 사나흘 동안은 경미한 허리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은 거의 회복되었지만, 대자연 속의 멀티피치 등반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로프나 등반장비를 악우들에게 부탁해가면서까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접근거리가 긴 등반을 계속한다는 건 염치 없는 행동이다. 이제는 현재의 내 건강과 몸 상태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보는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하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등반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일단은 어프로치 길이가 짧은 하드프리 암장에서 지지부진한 나의 클라이밍 실력부터 업그레이드 시켜보자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이렇게 마음을 바꿔 먹은 이후로 소소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엔 평소 운동하던 실내암장에서 오버행 벽의 홀드 40개짜리 지구력 문제를 처음으로 왕복하는 데 성공했다. 토요일인 어제는 당고개 인공암벽장에서 5.10c 루트를 역시나 처음으로 완등했다. 그리고 오늘 파주의 거인암장에서는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등반에 임했던 '자성(18m, 5.10c)' 루트를 두 번째 시도만에 깔끔하게 완등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동안 부상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여 난이도 5.10b 이상은 시도조차 망설이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니 새로운 목표가 생기게 되었고, 작은 목표나마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는 재미가 있었다.   

 

등반에 임할 때의 방어적이었던 태도가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는 바람에 내 클라이밍 능력의 향상을 저해하지는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본다. 나의 유리멘탈이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만들었던 면이 없지 않다는 생각이다. 물론 실내암장에서의 꾸준한 운동과 3개월 전부터 이어오고 있는 성공적인 다이어트가 클라이밍 뿐만 아니라 내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져다 주고 있는 점 또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클라이밍에서도 결코 서두르거나 무리하지 않고 한 단계씩 차근차근 진일보하면서, 희미한 불꽃처럼 사그라져 가는 내 안의 도전정신까지 일깨우는 자세를 견지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 만족스럽게 완등했던 루트인 '자성'이 나의 클라이밍에 관한 태도와 행동을 스스로 돌아보면서 반성하는 '자성(省)'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 2암장의 '자성(5.10c, 18m)' 루트를 완등한 후, 확보점에서 환희에 찬 만세를 불러봤다. 
▲ 불과 3주 전에만 해도 거인암장 초입에서 훤히 보이던 암봉이 이제는 무성해진 숲에 가렸다.  
▲ 암장 접근로 초입의 화단에서 싱그러운 청보리가 반겨주었다. 
▲ 바람을 피할 수 있고 조용한 2암장에 베이스캠프를 차려 놓고 등반을 시작했다. 빌레이 스테이션이 그늘이라서 시원했다.
▲ 먼저 익숙한 '자유(5.10a)' 루트에서 몸을 풀기로 한다.
▲ '자유' 루트를 등반 중이다. 출발점 부근의 그늘에서는 약간 서늘했는데 벽에 붙으니 땀이 좀 났다.
▲ 루트 초반에서 힘을 좀 써야 했던 '대현(5.10b, 15m)'을 오르고 있다. 크럭스를 잘 돌파하여 단번에 완등하니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 오늘의 프로젝트로 생각했던 '자성(5.10c, 18m)' 루트는 첫 시도에서 오버행을 올라서는 크럭스를 통과하지 못했다. 적절한 홀드와 동작을 찾아서 연습한 후에 두 번째 시도에서는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게 완등할 수 있었다.
▲ 자일파티인 모모도 나와 똑 같이 두 번째 시도만에 '자성'을 완등하여 기쁨은 배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오전 등반에서 밥값은 한 셈이다.
▲ 점심 이후엔 3암장으로 이동하여 '나우리(5.10a, 13m)'부터 등반했다.
▲ '나우리'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오후엔 황사도 물러나고 청명한 하늘이 드러나 모처럼 좋은 날씨를 보였다. 
▲ '나우리' 출발점 부근의 암벽에 자연적으로 생긴 균열이 꼭 원시인들이 새겨 놓은 벽화처럼 보였다.
▲ 힘이 많이 빠졌지만, 최근 윤길수 선생님이 개척하신 '생공사21' 루트에 붙어보기로 한다.
▲ '생공사21' 루트는 초반의 3개 볼트까지가 어려웠다. 여기까지는 원 볼트 원 테이크로 겨우 통과했다.
▲ '생공사21' 루트의 상단부는 그런대로 오를만 했다. 반드시 60미터 자일을 사용해야할 정도로 긴 루트다. 중간 중간에 낙석 위험이 있는 홀드엔 분필로 X자 표시가 되어 있으니 가급적이면 그곳을 피해서 손홀드를 찾아야 한다. 바로 우측에 다른 팀의 자일이 걸려있는 '여우비(5.10d)' 루트도 윤선생님이 최근 개척하신 바윗길인데 힘이 소진되어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 오늘 하루 하늘은 맑았으나 제법 세찬 바람이 불었다. 거인암장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등반을 즐겼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