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에 후배 교수들과의 술자리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인수봉 등반 약속이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개월만의 반가운 만남이어서 과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역시나 오늘 아침 기상 직후의 내몸은 비몽사몽에서 쉽사리 깨어나지 못하여 곧바로 인수봉 등반에 나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날씨마저 흐려서 마음이 더욱 소극적으로 움츠러든 탓인지 주말의 산객들 틈에 끼어 하루재로 향하는 등산로를 따라 인수봉에 접근할 생각이 전혀 동하지 않았다. 대신 어프로치가 짧은 거인암장에서 쉬엄쉬엄 몸을 회복하면서 게으른 등반이나 하고 오자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파주로 향했다. 이럴 때 대안으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자연암장이 집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아무도 없는 아침 시간에 도착한 거인암장 주변은 간밤에 소나기가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바위에 물기가 마르기를 마냥 기다리는 대신 준비운동 삼아 근처의 파평산 산림공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에 있는 파평체육공원 주차장에서 걷기를 시작하여 파평산 정상정자까지 왕복하는 2시간 남짓의 산행을 하고나니 어느 정도 몸이 깨어나는 듯했다. 마을 뒷산 같이 정겨운 숲길을 걷는 동안 맑은 공기에 심신이 정화되어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파평산 정상부에서는 거인암장 바로 옆의 타어거CC 골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파평산 전체에서 거인암장이 놓여 있는 위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어서 그동안의 지리적인 궁금증이 말끔히 해소되었다. 파평산을 내려오니 어느새 안개가 걷히고 온화한 햇살이 비춰 주고 있었다. 오전 11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거인암장으로 다시 왔는데, 예상과는 달리 단 한 팀 외에는 암장에서 등반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주말에 서울 근교의 암장이 이렇게 한적하리라곤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거인암장에 온 이후 처음으로 1암장 앞의 데크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1암장에서만 등반했다. 항상 많은 클라이머들이 자리를 잡는 곳이어서 일부러 피했었는데, 오늘은 암장이 한가해서 넓고 평평한 아지트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전히 등반 의욕은 별로 동하지 않았으나 일단은 암벽에 붙어보기로 했다. 전에 올라본 적이 있는 '기봉(5.10a)'과 '오리온(5.10b)' 루트에서 먼저 몸을 풀었다. 등반 거리가 30 미터에 이르는 두 루트를 오르고 나니 무겁고 굼뜬 몸의 근육이 어느 정도는 깨어나는 듯했다. 점심 이후엔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데크의 매트 위에 드러누워 살랑살랑 불어대는 시원한 바람을 자장가 삼아 선잠이나마 잠시 눈을 붙였다.
짧은 낮잠 후에 간밤의 부족했던 잠을 보충한 듯한 개운함 때문이었는지 등반할 의욕이 조금은 발동하는 듯했다. '오리온' 루트에서 톱로핑 방식으로 근육을 다시 일깨운 다음에 '봄향기(5.10b)'를 등반한 후, '일원상(5.10c, 22m)' 루트를 온사이트로 완등하는 기쁨을 누렸다. 내친김에 '자일의 정(5.10c, 15m)' 루트의 온사이트 완등까지 노렸으나, 크럭스 구간에서 로프 테이크를 외치고 말았다. 동작은 풀었으니 체력이 있을 땐 완등할 수 있으리란 느낌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맑은 공기 마시면서 휴식이나 취할 생각으로 왔던 거인암장에서 5.10c 루트 하나는 온사이트로 완등했다는 자그마한 소득에 기분은 그런대로 좋았다. 몸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때에도 등반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오늘의 등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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