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동 숙소에서 아침 7시 즈음 장군봉을 향해 출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밖에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 비가 내리고 있다. K 등산학교 1반의 다른 조들도 역시나 등반지로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내에서 장비 사용법을 교육하는 조들도 있다. 우리보다 이틀 후인 어젯밤에 도착한 2반 35명은 오늘이 첫날이다. 레벨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 2반이 먼저 빗속을 뚫고 소토왕골 암장으로 출발한다. 이기범 선생은 2반이 대기 중인 비선대 식당의 상황을 전화로 살펴보는 중이다. 아무래도 등반을 포기해야 할 듯하여 플랜 B에 대해 상의하던 중 빗줄기가 약해진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출발을 결정한다. 답답한 실내에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는 비를 맞더라도 산에 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예정보다 두어 시간이 늦어진 오전 10시 경에 어프로치를 시작하여 이기범 선생이 장군봉 '기존길' 등반을 위한 첫 스텝을 내딛은 시간은 11시 30분 즈음이다. 그동안 비는 완전히 멈춰 주었다. 흐린 하늘이 등반하기엔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이다. 장군봉의 바위 표면에 약간의 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우리가 등반할 '기존길' 루트는 전반적으로 말라 있는 듯 보였다. 비가 그친 후에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준 까닭이다. 오늘은 광복절이다. 토요일과 겹쳐서 다음 월요일이 대체공휴일로 지정된 3일 연휴의 첫날이기도 하다. 어젯밤 조별모임에서 날씨보다는 전국에서 몰려들 많은 클라이머들로 장군봉 일대의 바윗길이 붐빌 것을 걱정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오늘의 장군봉 바윗길은 우리 독수리 5형제의 독무대가 되었다. 설악산 등반을 계획했던 거의 대부분의 팀들이 날씨 탓에 계획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기존길'은 장군봉을 대표하는 가장 길고 자연스러운 바윗길로 슬랩, 크랙, 침니 등이 번갈아 이어지는 아주 인기 있는 루트이다. 예전부터 내가 오르고 싶은 바윗길 목록 중에서 으뜸으로 꼽던 곳이었는데 그간 기회가 잘 닿지 않았다. 이렇게 고전적이고 좋은 바윗길을 광복절 연휴의 시작일에 아무런 정체 현상도 겪지 않고 오롯히 우리들만이 등반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수 년 전 알프스를 트레킹할 때 국내의 모 재벌 회사가 프랑스 샤모니-몽블랑의 스키 슬로프 하나를 통째로 빌리는 바람에 현지인들의 빈축을 샀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다. 반면, 우리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장군봉 바윗길 전체를 선물로 받은 격인데 오히려 남들의 비난이 아닌 부러움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고, 돈 들이지 않고도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우리 독수리 5형제가 장군봉 정상에 올라 시원한 바람 속에 펼쳐지는 설악의 절경을 감상하며 벅찬 가슴으로 맞이한 환희의 물결은 두고두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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