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적벽은 비선대 계곡에서 올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난다. 나 같은 보통 수준 이하의 클라이머들은 눈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거대한 오버행의 적벽 앞에서 오르고 싶다는 도전 의식보다는 과연 내가 저 벽을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게 마련이다. K 등산학교 암벽1반 1조의 첫 등반지로 적벽이 결정되었을 때 적잖은 부담감을 떨칠 수 없었다. 적벽의 날등을 타고 오르는 삼형제길 릿지를 등반한 경험은 있지만, 오버행 구간이 대부분인 '자유2836'과 '채송화 향기' 루트를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소공원에서 비선대까지 이어지는 일반 등산로를 따라서 적벽에 다가서는 동안 5명이 함께 줄을 묶게 되는 멀티피치 등반에서 최소한 민폐는 끼치지 말자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했다.
'자유2836' 루트는 전체 4피치로 구성되어 있다. 1피치 초반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구간이 오버행이다. 개념도 상의 피치별 등반 난이도는 각각 5.10a, 5.11a, 5.11b, 5.10b로 표기되어 있다. 먼저 이기범 선생이 선등하여 두 동의 로프를 설치하면 치득씨와 인호씨가 거의 동시에 오르고, 치득씨가 다음 피치를 오르는 이기범 선생의 선등자 확보를 보는 동안 인호씨는 다음 후등자인 세령씨를 확보한 후, 내가 세령씨의 확보를 받으며 라스트로 오르는 순서로 등반하였다. 치득씨와 인호씨의 등반 능력이 출중하여 예상보다 빠른 시간 내에 5명 모두가 등반을 완료할 수 있었다. 어려운 구간에서는 퀵드로와 슬링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으나 우려했던 것보다는 한층 더 만족스런 등반이었다. 한 차례의 60미터 오버행 하강과 추가적인 30미터 하강 한 번으로 출발점에 귀환하여 점심 시간을 가졌다.
내심 '자유2836' 루트 등반의 여운을 즐기고 싶었으나, 등반 열정 최고인 이기범 선생은 스피드 등반으로 생긴 시간적 여유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점심 직후에 '자유2836' 바로 우측에 있는 '채송화 향기' 루트 등반에 나섰다. 총 3피치의 '채송화 향기'는 피치별 난이도가 각각 5.10a, 5.10c, 5.11a이다. 이기범 선생이 첫 피치 등반을 마치고 치득씨와 인호씨까지 확보점에 도착한 순간부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법 굵은 빗줄기여서 출발점 근처엔 작은 폭포처럼 물이 흘러내렸다. 세령씨와 나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위에 있는 세 사람만 등반하라고 내가 아래에서 소리쳤다. 다행히 적벽은 오버행이어서 벽에 붙어 있을 땐 비를 거의 맞지 않는다. 나와 세령씨는 등반을 포기하고 있는데 잠시 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이기범 선생이 2피치까지 등반 완료한 상태에서 세령씨가 출발하고, 뒤이어 나도 벽에 붙을 수 있었다. 그렇게 5명 모두가 '채송화 향기' 3피치 정상에 섰을 때의 만족감은 매우 컸다. 돌이켜 보면 비로 인한 우여곡절을 가장 어려운 바윗길인 적벽에서 함께 극복해냈다는 사실이 우리 5명을 더욱 단단히 연결시켜 준 듯하다. 독수리 5형제의 탄생 설화는 적벽에서 발휘된 동료애를 바탕으로 이렇게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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