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트 메스너는 독일이 낳은 현존 최고의 등반가이다.
그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최초로 달성했다.
8천미터급 14좌를 인류 최초로 완등한 사람이기도 하다.
<죽음의 지대>는 이렇게 위대한 등반가인 메스너에게는 좀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등반사에 수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메스너는 한 번도 추락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운 거리에서 지냈지만 죽음 자체를 경험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메스너는 등반 시에 직면하는 죽음의 본질과 현상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 탐구의 결과물이 논문과 같이 쓰여진 이 책 <죽음의 지대>인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꾸준히 내게 남겨진 인상은 메스너의 솔직함과 통찰력이다.
다양한 체험을 쌓은 이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소박함을 메스너는 갖춘 듯 하다.
우리가 보기엔 위대한 등반가이지만 이 책 속의 화자인 메스너는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학자적 자세와 솔직함을 겸비한 한 인간일 뿐이다.
등산을 마약과 같이 환각을 쫒는 행위로 보는 세인들의 시각을 메스너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약물에 의한 고양과 등산에 의한 고양의 다른 점을 냉철하게 제시한다.
약물을 끊었을 때 마약중독자는 우울증에 빠지지만 등반가는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추락을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 또다시 산에 오르는 이유도 차분히 분석해낸다.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도 죽음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는 것 같은
그들의 모순적 심리 상태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려하지 않는다.
모순적 상태 그대로 바라보자고 하는 자세는 메스너의 솔직함과 여유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메스너의 결론은 자신에게 다짐하는 등반 자세이자 등반 애호가들을 위한 권면이다.
그는 "정복을 위한 등반"에서 "존재를 위한 등반"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존재를 위한 등반의 첫 단계로 정상을 소유 가능성으로 보는 눈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등반을 단호히 배격하는 메스너의 순수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메스너는 등반 체험을 낭만 체험, 업적 체험, 환상 체험으로 분류한다.
<죽음의 지대>는 이제껏 아무도 다루지 않았던 등반의 환상 체험에 관한 책이다.
죽음에 직면한 등반가들의 환상 체험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가 있었기에
메스너는 한 번도 추락을 경험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장 확실한 것에 대한 사유를 좋아한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모두에게 확실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철학이 깊어질수록 삶의 깊이 또한 깊어질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다.
메스너의 삶과 그의 저서 <죽음의 지대>는 이 사실을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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