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Touching the void : 허공 만지기)

빌레이 2009. 5. 26. 17:23

대학 때 소설을 쓴 적이 있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학생회지에 실리기도 했었다.

소설을 쓰다보면 가장 어려운 것이 묘사다.

스토리 전개는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므로 써나가기가 오히려 쉽다.

하지만 소설을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풍경이나 주변환경의 묘사,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 등은 어려운 작업이다.

 

파사 형이 빌려준 책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는 생생한 실화이다.

직접 체험한 등반기이며, 삶과 죽음을 넘나든 경험을 써내려간 생존기이다.

그래서 이 책에 나타난 주변 묘사와 심리 묘사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책 읽기와 영화 보기가 다른 점은 묘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영화는 다분히 객관적이며 일률적인 묘사를 보는 이에게 강요한다.

책 읽기는 독자 개인의 주관 속에 책의 묘사를 녹여내기 때문에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세밀한 묘사에 감탄했다.

직접 체험했다 하더라도 치밀한 사고가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묘사들로 가득차 있다.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 두 자일 파티의 믿기 힘든 등반기.

너무나 생생해서 같이 등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잘 쓴 글이다.

번역본의 제목은 좀 선정적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친구의 자일을 끊어야 하는 잔인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 속에서 친구의 자일을 끊는 대목은 여러 가지 등반 행위 중의 한 과정일 뿐이다.

원제가 <허공 만지기(Touching the void)>인데, 이 제목이 훨씬 더 어울린다.

 

세상 속의 관점에서 보면 친구의 자일을 끊는다는 것이 큰 죄일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지대를 오르는 자들에게 세상의 법칙이나 윤리 의식은 통하지 않는다.

이런 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을 읽었다는 것이 기쁘다.

뇌리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헌책으로 읽었는데 새책으로 다시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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