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드리고

빌레이 2009. 5. 26. 17:24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더 이상 아버지를 뵙지 못하게 되었다.

변하지 않을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괴롭고 슬프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아버지 장례식을 무사히 마쳤다.

맞상주 노릇을 한답시고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시간의 흐름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약간은 혼미한 상태에서 침착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내 놓고 보니 장례식 절차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가시는 날까지 그리고 가신 연후에도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훌륭함을 잃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한 건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이다.

동생으로부터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밤중에 내려갔다.

아버지는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 나와 눈길을 맞추셨다.

눈을 맞출 힘도 없을 것 같은 상태에서 잠깐 동안 당신의 아들을 인식하신 것이다.

결국 그 순간이 나와 아버지의 마지막 교감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이 있다.

초등학교 국어책에서 보았던 달가스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꾼 덴마크의 영웅 달가스와 아버지가 참 많이 닮아 보였다.

어릴적 아버지는 새벽 세시나 네시에 들로 나가셨다.

그때부터 삽과 곡괭이로 야산을 개간하여 수박 농사를 지으셨다.

김남주의 시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버지는 타고난 농사꾼이다. 농작물을 자식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한 일념으로 사셨던 그 모습이 내게는 무서워 보일 정도였다.

다른 시골 아버지들과는 달리 내게도 은근히 농사일을 물려주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내가 공부에 뜻이 있다는 것을 아신 이후로는 모든 것을 지원해주셨다.

주위에서 의대나 법대를 권유했던지라 아버지 마음도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수학과에 진학한 아들을 항상 자랑스러워 하셨다. 적어도 내 앞에서는.

아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셨던 것이다.

 

중학교 이후로 내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물으면 항상 "부모님"이라고 답했다. 

다른 어떤 위인들보다 내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님 중의 한 분인 아버지가 이제는 없다. 그래서 슬프다. 많이 많이...

앞으로 이런 상실감은 무시로 찾아들 것이다.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좀 더 많은 사랑을 올려드리지 못한 나를 자책할 것이다.

이러한 자책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하여 어머니께 더욱 진한 사랑을 드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