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강촌 유선대 암장 - 2024년 11월 2일(토)

빌레이 2024. 11. 4. 14:08

등반 계획이 제대로 꼬인 하루였다. 기범씨가 '춘클릿지'에서 외국인 2명의 가이드 등반에 나서기로 했었다. 은경이와 내가 동행하기로 하고, 강촌역에서 9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리 셋은 7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8시 30분 전에 강촌에 미리 도착하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평택 미군기지에서 근무한다는 2명의 외국인은 우여곡절 끝에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른바 노쇼(no-show)를 당한 기범씨의 실망감이 가장 컸을 테지만, 곁에서 이를 지켜보는 내 마음도 그리 편할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이 상의한 끝에 '춘클릿지'에 대한 생각은 깨끗이 잊기로 하고, 그 대안으로 '조각상 릿지'를 등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등반 출발점에 도착해 보니 이미 여러 명이 대기 중에 있었다. 그들도 3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가까운 유선대 암장으로 이동하여 아무런 부담 없이 편안한 시간을 갖기로 했다.

 

강선사 입구에서 유선대 암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비로소 한가로운 가을날의 평화로움이 찾아들었다. 환하게 빛나고 있는 탐스러운 국화꽃과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조금이나마 상처 받은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우리팀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유선대 암장에서의 등반은 목표의식이나 열심이 있을 수 없는 마냥 게으른 등반일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낙엽이 눈처럼 흩날리는 만추의 낭만에 젖기도 하면서 서두를 것 하나 없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 같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일이 잘 풀릴 때는 기뻐하면서도 주위를 둘러보며 겸손함을 잃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중요하다.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은 그러려니 하면서도 절대 포기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된다. 모든 일에 깃들어 있는 사랑과 희망을 발견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나의 고리타분한 소신을 다시금 일깨워 준 소중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