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개인 다음 날 아침의 하늘은 한결 더 높고 푸르다. 구름 조각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지만 등반하기 더없이 좋은 날씨다. 아침 8시 즈음에 도선사주차장에 도착한다. 기범씨가 새벽 등산을 마치고 빠져나가는 차의 빈 자리를 매의 눈으로 발견하여 곧바로 주차한다. 오늘 등반이 잘 풀릴 듯한 예감과 설레는 가슴을 안고 인수봉 남벽 앞으로 접근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작년 10월 중순에 고통스런 허리 통증을 처음으로 겪었던 장소가 바로 인수봉이었다. 등반 도중에 악우들을 암벽에 남겨두고 나 홀로 조심스레 하산해야 했던 그날 이후로 오늘이 첫 인수봉 등반이다.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고, 비 온 후에 맑게 개인 하늘이 더욱 푸르듯 척추관협착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내 몸은 한결 더 건강해지고 가벼워졌다. 내 삶에서 클라이밍이 더욱 소중해졌고, 예전보다는 한층 더 즐거워졌다.
'거룡길'은 예전부터 오르고 싶던 바윗길 중의 하나다. 인수봉 남면 중단에서 동면 끝까지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너비 2미터 정도의 밴드는 멀리서 보면 커다란 바위를 휘감고 있는 한 마리의 거대한 용처럼 보인다. 그 용의 머리 부분에 '거룡길' 루트가 자리한다. 기범씨의 선등으로 시작된 거룡길 첫 피치는 40미터 가까운 등반 거리의 수직벽에 자유등반 난이도가 5.12b에 이르는 크럭스가 버티고 있는 멋진 구간이다. 기범씨의 확보를 받으면서 쎄컨으로 오른 나는 당연히 크럭스를 고정 슬링에 오른 발을 끼우고 일어서는 인공등반 방식으로 통과했다. 둘째 피치는 밴드를 따라서 이어지는 양호한 손홀드를 잡고 트래버스 하는 구간이다. 중간 볼트가 없어서 선등자는 캠으로 중간 확보점을 구축하면서 진행해야 한다.
'거룡길' 셋째 피치부터는 2피치 확보점에서 좌측으로 진입하여 어려운 슬랩으로 가야 하지만, 우리 팀은 정상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서 비어 있는 직선 루트의 슬랩과 '크로니길'의 크랙, '여정길' 마지막 피치의 슬랩을 연결해서 등반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거룡길' 전체 피치를 온전히 등반해볼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화창한 날씨 속의 인수봉 정상에서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기범씨표 에스프레소 커피를 곁들인 행복한 점심시간을 가졌다. 정상에서의 여유로운 망중한을 한껏 즐긴 후에 하강하여 남은 시간은 그늘진 남벽의 스포츠클라이밍 루트에서 연습하는 것으로 보냈다. '꾸러기 합창', '학교B', '우리들의 만남' 루트에 차례로 매달렸다. 시종일관 모든 순간이 행복했던 올해의 첫 인수봉 등반을 알차고 보람차게 즐길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
아래는 기범씨가 촬영해준 내 모습이다.
'암빙벽등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름 한낮의 거인암장 - 2021년 7월 17일(토) (0) | 2021.07.18 |
---|---|
강촌 유선대 암장 - 2021년 7월 10일(토) (0) | 2021.07.11 |
파평산 산림공원과 거인암장 - 2021년 6월 5일(토) (0) | 2021.06.06 |
양주 독립봉암장 - 2021년 5월 23일(일) (0) | 2021.05.23 |
원주 칠봉암장 - 2021년 5월 19일(수) (0) | 2021.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