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친척집의 서가에 꽂혀있던 <임어당 전집>을 기억한다. 아마도 방학 중에 가끔 놀러가던 광주의 작은집이었을 것이다. 양장본으로 된 무슨 무슨 전집들이 거실 책장에 장식품처럼 진열되어 있었고, 그 중에 한 시리즈가 <임어당 전집>이었다. 그때는 임어당이 한국의 작가인줄로만 알았었다. 책읽기보다는 밖에서 동무들과 노는 것이 더 즐겁던 시절이어서 책을 펼쳐본 기억일랑은 아예 없다. 대학생 시절에도 임어당의 책은 읽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의 루쉰(노신)이나 린위탕(임어당)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헷세 같은 서양 작가들보다 내게는 친숙하지 않았다.
린위탕 선생의 <생활의 발견>은 꽤나 오랫동안 내 주위를 맴돌았다. 소설처럼 줄거리가 있는 글이 아니어서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게된 까닭이다. 일이 바쁠 땐 책상 한 켠에 천덕꾸러기처럼 굴러다니기도 했었다. 말기암 투병 중이신 장모님을 지켜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장모님의 생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음이 심란한 요즘이다. <생활의 발견> 책의 남은 부분을 끝까지 읽으면서 다시금 일상 생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조금은 위안을 얻게 되었다. 린위탕 선생은 동양인이면서 서양의 학문을 익힌 학자이기에 여러 면에서 내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얘기를 들려주신다. 공감이 큰 부분은 밑줄 그어가며 세세히 읽다보니 어느덧 린위탕 선생과 속 깊은 대화를 오래 나누고 친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앞으로도 자주 생각날 듯한 책 속의 구절들을 여기에 옮겨본다.
대개 철학에는 깨달음에서 오는 황홀한 느낌이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중략... 철학자란 그날그날 자기 일에 파묻혀서 자기 일의 성패와 이해 득실만이 절대적인 현실이라고 굳게 믿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이를 뜻한다.
어느 시기가 오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는, 이 초라한 인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평화스럽게 일하고 무던히 참고 즐겁게 살려면 생활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 것인가, 중국 철학자들은 이 점을 문제로 삼고 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이상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반드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나 박식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물을 옳게 받아들여 사랑하고, 옳게 미워하는 사람을 뜻함이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중략... 한번 책을 손에 들게 되면 사람은 곧 다른 세계에 드나들 수 있게 된다. 만일 이 책이 양서라면 곧 세계1급의 이야기꾼 중의 한 사람과 만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죽더라도 뒤에 남겨놓은 일이 여전히 후세의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아무리 적은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인 생명 속에서 한 구실을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중략... 육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학 성분의 결합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육체가 없어졌기로 그게 어쨌다는 것인가. 인간은 차차 자기의 일생이 영원히 흘러서 그치지 않는 큰 강물 속 한 방울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기꺼이 생명의 대본류(大本流)에 자기의 구실을 맡기게 된다. 그다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논리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에 상식이 있다. 상식이라고 하기보다 '경우'라고 하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경우(사리나 도리)를 중히 여김은 인간 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 이상이라서 경우를 아는 사람은 으뜸가는 문화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