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에 샤모니 시내의 빵집에서 허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발로신에서 몽테 고개로 넘어오는 트레킹을 계획하고 아침 식사를 겸해서 빵집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숙소에서 시내로 걸어가는 동안 서서히 산 아래의 안개가 걷히고 몽블랑 정상부의 모습이 깨끗하게 열린다. 샤모니에 도착한 첫날을 제외하고는 계속 흐렸던 날씨가 맑아진 것이다. 아침 6시 반에 문을 연다는 빵집은 이른 시각인데도 줄을 서서 주문해야할 만큼 사람들이 많다. 에귀디미디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알파인 등반을 즐기려는 등반가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부부와 함께 트레킹을 하기 위한 차림으로 나온 허선생님께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양해를 구하고 에귀디미디 전망대를 다녀오기로 한다. 나는 몇 번 다녀왔지만 아내가 샤모니에 머무는 동안 한 번은 꼭 다녀와야 하는 관광 코스라는 생각에서 맑은 날을 기다렸기 때문에 허선생님도 우리의 계획 변경에 흔쾌히 동의해 주신다. 내가 2002년도에 처음 올랐을 때 전망대가 구름 속에 잠긴 바람에 아무 것도 구경하지 못했던 아쉬운 기억이 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일정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이후로 두 차례는 샤모니에 며칠 간 머무르는 동안 일기예보를 보면서 청명한 날을 기다릴 수 있었기 때문에 만족스런 조망을 즐길 수 있었다.
몽블랑 최고의 전망대로 해발고도 3842 미터에 자리한 에귀디미디는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 호텔의 아침식사 시간 전에 올라가는 것이 정체를 피할 수 있고 전망을 즐기기에도 여러모로 좋다. 허선생님과는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하고 빵집을 나와서 바로 옆에 있는 케이블카 역으로 이동한다. 벌써 길게 줄이 서 있지만 얼마 기다리지 않고 표를 살 수 있었다. 이태리에 속한 전망대인 헬브로너까지 다녀오는 표를 끊고 케이블카에 탑승한다. 중간 기착지인 플랑데귀에서 한 번 갈아타서 곧장 에귀디미디 전망대에 오른다. 네 번째로 오른 나에게는 익숙한 곳이기에 아내 앞에서는 관광가이드처럼 행세한다.
웅장한 4천 미터대 몽블랑 산군의 위용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알파인 등반을 즐기고 싶은 욕구가 잠시나마 꿈틀댄다. 갑작스레 일정을 변경한 탓에 충분한 보온 의류를 준비해오지 못했다. 폴라텍 셔츠를 아내에게 입혀 주고 나는 추위로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지만 전망대 이곳 저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다보니 그런대로 견딜만 하다. 보쏭 빙하와 몽블랑 정상을 배경으로 하여 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된 천 길 낭떨어지 위의 돌출된 곳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장소가 새롭게 설치되어 있다. 돈을 내고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이 많았지만 의향을 물으니 아내는 망설임 없이 단념한다.
에귀디미디 전망대를 모두 구경하고 이태리의 헬브로너 전망대로 가는 파노라마 케이블카에 오른다. 거의 수평으로 움직이는 이 케이블카는 발레블랑쉬 설원 위를 가로지른다. 몽블랑 산군의 빼어난 봉우리들과 하얀 설원에서 이어진 메르데글라스 빙하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이 파노라마 케이블카는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조망을 편안히 즐기도록 하기 위해 움직이는 중간 중간 잠시 멈추기를 반복한다. 몽블랑 터널 건너편의 이태리 꾸르마이어에서 올라오는 케이블카의 기착지인 헬브로너 전망대는 새롭게 단장되었다. 구름 속에서 흐릿한 조망만을 즐긴 것이 아쉬웠으나 이태리의 예술적 감각으로 새롭게 태어난 전망대 내부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헬브로너 전망대에서 에귀디미디로 돌아오는 파노라마 케이블카에서는 갈 때와 달리 우리 부부 외에 미국 관광객 한 명이 더 동승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샌디에고에서 왔다는 건장한 체격의 이 중년 남자는 서핑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서핑 전문가다운 풍모가 짙게 풍기는 이 친구와 몇 마디 대화에 금방 친해져서 어색한 침묵 없이 케이블카에 있는 동안 세 사람이 모두 즐거울 수 있었다. 내가 등반을 좋아한다고 소개하고 개미처럼 보이는 알파인 등반가들처럼 나도 저렇게 등반을 했었다고 하니 이 친구가 약간은 놀랍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몽블랑 정상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는 이 친구에게 주변 봉우리들과 주변 지명을 하나 하나 설명해주었다. 드류, 그랑드조라스, 당뒤제앙, 뚜르롱드, 그랑카푸생 등의 봉우리들과 발레블랑쉬 설원에서 뻗어내린 메르데글라스 빙하, 하이라이닝을 즐길 수 있는 두 개의 뾰족봉, 등반사의 간단한 이야기까지 나에게는 익숙한 얘기들을 펼쳐 놓으니 이 친구가 대단히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자 더 나아가 헤르만 불, 발터 보나티, 알버트 머메리 등의 등반가와 미국 상표인 노스페이스에 얽힌 얘기까지를 덧붙인다. 이 친구도 미국의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60분>에서 알렉스 호놀드의 프리솔로 등반에 대한 얘기를 보았다며 자신의 느낌과 함께 내 얘기에 맞장구를 쳐준다.
나는 물을 무서워해서 서핑은 안해봤다고 하니 자기는 등반이 정말 무섭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는 서핑이 안전하다고 강변하고 나는 등반이 더 안전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며 서로 껄껄대며 웃는 상황도 있었다. 에귀디미디에 도착해서 케이블카를 내릴 때에 이 친구는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는 시늉을 하더니 나에게 좋은 설명 잘 들었다며 가이드 비용을 주겠다는 농담을 던진다. 케이블카에 동승했던 미국 관광객과의 유쾌한 만남을 뒤로 하고 우리 부부는 플랑데귀로 하산하여 그랑발콩노르 트레킹 길에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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