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앙 호수 옆의 뻬레린(Les Pelerins)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숙소에서 몽블랑익스프레스 기차 시간에 맞춰 여유있게 나오다 보면 자연스레 가이앙 호수를 한 바퀴 돌게된다. 간이역처럼 생긴 뻬레린역의 플랫폼에서는 몽블랑 정상과 쏟아질 듯한 보쏭 빙하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기차역도 드물지 싶다. 뻬레린역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쁘라(Les Praz) 마을에서 하차한다. 플레제르 언덕으로 오르는 케이블카에 탑승하여 순식간에 고도를 높인다.
플레제르에서 세서리 호수로 가는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산허리를 감아도는 등로가 힘들지 않아서 여유만만이다. 길 주변으로는 알핀로제 군락이 초원처럼 한없이 펼쳐진다. 드류와 그랑드조라스부터 몽블랑까지 이어지는 설산들이 배경을 장식하는 원경은 바로 뒤에 펼쳐진 병풍처럼 거리감을 잃게 한다.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트레커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내와 둘이서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전망 좋은 곳에서는 기념 사진 찍기도 잊지 않는다. 아르장띠에에서 올라오는 산길 주변의 폭포에서 일본인 부부 트레커를 만난다. 그들의 빛바랜 배낭이 트레킹의 연륜을 느끼게 한다. 반갑게 인사 나누는 서로의 밝은 얼굴이 아침 햇살에 더욱 반짝인다.
잠시 후 우리 앞을 걷고 있던 프랑스 리용에서 왔다는 노부부를 만난다. 할머니에게 우리 부부의 기념 사진을 부탁하니 유쾌하게 찍어주신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묻는다. 유럽에서 나이 든 세대들에게 남한과 북한에 대한 차이는 별로 없는 듯하다. 한동안 우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걷던 중 할아버지께서 산양을 발견하시고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신다. 저멀리서 뒤따라오는 사람에게도 휘파람을 불어서 산양 있는 곳을 손짓해 주신다. 야생 동물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트레커들은 먼저 본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다. 몽테고개에서 올라오는 주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서 프랑스인 부부와 헤어져 우리는 세서리 호수로 가는 오솔길로 접어든다.
예닐곱 개의 알파인 호수들로 이루어진 세서리 호수를 아래에서부터 차례대로 살펴본다. 첫 번째 호수에 가기 직전에 산양 가족을 만나서 한참을 촬영에 열중한다. 산양과 익숙해지기를 기다린 후 바로 옆까지 근접해서 그들을 관찰할 수 있으니 가슴이 설레인다. 어릴 때 집에서 흑염소를 키우면서 뿔을 잡고 등에 올라타서 놀던 시절의 추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세서리 호수들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호수는 라끄블랑으로 가는 등로의 반대쪽에서 보는 풍경이 그림 같다. 역광으로 비치는 설산의 모습이 구름에 가려 조금은 아쉽지만 잠시나마 하얀 구름이 자연 프레임 역할을 해준 순간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알핀로제가 곳곳에 피어 있는 세서리 호수 주변을 산책하면서 산양과 마모트 같은 야생 동물도 만나게 되니 동화 속을 걷고 있는 듯한 행복감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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