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트레킹

설악산 공룡능선 - 2005년 10월 1일

빌레이 2009. 5. 28. 17:11
우리는 그날 설악의 품에 깊숙히 안겼다.
가을비 속에 출발한 우리의 공룡능선 등반은
변화 무쌍한 설악을 십분 느끼기에 한 점 부족함이 없었다.
그날 하루 종일 우리 셋은 설악산에 있었고, 그 순간 한없이 행복했다.
 
서울을 탈출해야 하는 금요일, 많은 비가 내렸다.
비를 걱정할 여유도 없이 바빴던 직장 일이 오히려 등산에 대한 염려를 잊게 했다.
오후 들어서 케빈과 파사 형에게 전화가 온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최종 참가자는 셋으로 줄어든다.
 
파사 형의 차로 밤 11시경에 서울을 나섰다.
몇 가지 연구 프로젝트로 바쁜 나날을 지내야 했던 나의 체력이 은근히 걱정된다.
아니나 다를까 미사리를 지나면서 몸이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다.
어울리지 않게 차 멀미가 난다. 파사 형이 걱정한다.
케빈도 월말이라 바빠서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인다.
파사 형도 요사이 잠이 부족했다고 한다. 
세 사람 모두 누군가 먼저 산행 계획의 취소를 결정해주기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양수리를 지나 첫번째 휴게소에 들렀다. 약이 없다고 한다.
다음 휴게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용문 가까이 있는 휴게소에서 기어이 토악질을 했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파사 형이 멀미약을 손에 들고 살며시 웃는다. 구세주 같다.
내가 약을 먹고난 후, 일행 모두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한다.
파사 형은 나의 몸 상태에 따라서 계획 변경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공룡 등정을 허락해 주시도록 진정으로 기도드리고 차 안에서 한 숨 청한다.
 
한시간 반 정도의 수면이 몸을 어느 정도 안정되게 만들었다.
이번이 세번째의 공룡 도전이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밀어부치기로 마음먹었다.
파사 형은 걱정스런 마음을 표현하지만, 내 의지를 꺾지는 않으신다.
우여곡절 끝에 비 속을 뚫고 새벽 5시 반경 설악동에 도착한다.
 
장비 점검하고... 드디어 출발이다.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다.
헤드랜턴은 쓰자마자 제거한다. 여명이 밝아온 까닭이다.
비선대까지 빗줄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기세는 한풀 꺾였다.
비선대에서 금강굴에 오르는 길은 비를 신경쓸 여유가 없다.
직각에 가까운 오르막과 비로 인한 미끄러운 바위길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첫번째 능선길에 올라 보지만 구름 때문에 시야는 확보되지 않는다.
마등령 오르는 능선길에서 바라보는 화채는 참 아름다운데.... 아쉽다.
능선길에 올라섰다고 해서 오르기가 편한 것은 아니다.
마등령까지는 쉼없는 오르막이다. 이번 코스 중에서 가장 힘든 구간이다.
 
마등령 오르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처음으로 설악의 비경을 맛본다.
정면의 천화대 기암괴석과 골짜기의 끓는 듯한 운해... 글로는 표현이 안 된다.
설악산 운해를 찍은 사진 대부분이 바로 이 곳에서 잡은 것이다.
전라도에서 온 듯한 일행들이 감탄과 탄성을 지른다.
그 중 한 사람은 이 광경을 매일 아침 TV에서 애국가 나올 때 보기 때문에
별로 새롭지 않다고 말한다. 주위 사람들이 웃는다.
 
뒤로는 세존봉이 우뚝 서 있고, 정면에는 천화대의 화려한 바위들...
그리고 발 아래 가까운 곳은 단풍의 물결과 코 앞의 고사목 한 그루.
이 보다 완벽한 조화는 없다.
케빈은 처음 보는 풍경에 넋을 잃은 듯 한동안 말이 없다.
다음 행동은 배터리 닳아질 때까지 카메라 셔터 누르는 것.
 
마등령 정상에서 라면과 햇반으로 점심을 먹는다. 말이 필요 없는 최고의 맛을 느낀다.
오세암 갈림길을 지나니 드디어 공룡 초입이다.
그렇게 오르고 싶었지만 두 번이나 돌아서야 했던 설악의 백두대간,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며 설악의 비경을 무한히 간직한 공룡능선... 
그런 공룡을 오늘은 기필코 오르리라 다짐한다.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다지고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나한봉을 시작으로 1275봉을 거쳐 신선봉에 이르는 5시간여의 대장정이다.
급격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등산로는 마등령 오르는 길보다 오히려 힘들지 않다.
능선 중반부까지 좀처럼 시야는 열리지 않는다.
몇년 전 처음으로 공룡에 올라서서 보았던 동해바다와 내설악의 시원한 풍경을
이번에는 보여주지 않는다.
 
1275봉 근처에서 보았던 광경 중 압권은 한쪽 사면에 운해를 가두고 있는 바위 능선이다.
구름이 바위 능선을 넘지 못하는 형국인데, 끓는 물을 담고 있는 솥단지 같다.
반대쪽 사면은 내설악의 단풍과 기암괴석이다.
전망대 이후로 또 한번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공룡능선 말미의 신선봉 근처는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내설악 쪽의 시야는 완전히 확보되어 큰 산과 웅장한 골짜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설악은 큰 산이다." 이 말을 진정으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위대한 자연 앞에 서 있는 나는 한없이 작고 초라하다. 소중한 느낌이다.
 
무너미 고개에서 곧바로 천불동을 향한다. 시간 관계상 희운각은 생략한다.
양폭산장까지는 지독한 안개 속이다. 10 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양폭에서 오련폭포, 귀면암 등을 거쳐 비선대에 이르는 천불동 계곡의
아름다움은 우리나라 계곡 중에서 최고이다. 계곡 양안은 수직에 가깝다.
 
양폭산장에서 두번째 식사를 하고 하산길을 재촉한다.
귀면암에 이르니 날이 어두워진다. 파사 형은 뛰다시피 하산하여 보이지 않는다.
케빈과 둘이서 헤드랜턴을 켜고 지루한 산행을 계속한다.
발바닥은 뜨겁고, 무릎은 팍팍하다. 편하지 않은 내장에선 계속 신물이 넘어온다.
 
비선대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과 합류하여 설악동으로 향한다.
출발할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하산 때의 이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지칠대로 지친 몸이 자꾸만 뒤쳐지게 한다. 드디어 주차장에 도착한다.
시간을 확인하니 8시가 거의 다 되었다.
산행 거리 21 킬로미터, 장장 13시간여에 이르는 대장정을 하루만에 마친 것이다.
 
차에 올라 파사 형에게 이제 다시는 설악에 오르지 않을거라 말했다.
정말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말에 형은 웃는다. 그 생각 얼마 못 갈거라고...
파사 형과 케빈에게 썩어 없어지기 보다 닳아서 없어지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갑자기 내뱉었던 이 말이 설악에서 보낸 하루를 갈무리하는 것 같다.
 
속초 시내의 찜질방에서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인 후에 서울로 향했다.
출발 직전에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먹은 내장탕은 정말로 맛있었다.
나는 약국에서 산 위장약과 멀미약을 복용한 후 차에 오르자 마자 곯아떨어졌다.
파사 형은 힘든 내색 하나 없이 그런 나를 집 앞까지 배달해 주셨다.
눈물나게 고마운 마음이다.
전화 상으로나마 설악등반을 동행한
따오기 형의 따뜻한 마음도 짙은 고마움으로 남는다.
이 모두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