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선배인 기영이 형과 처음으로 산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대학원 시절 친한 선후배 사이였지만 함께 산에 간 적은 없었다. 형은 내 제자들 여러 명이 근무하고 있는 중견 기업의 임원이다. 그동안 골프 치는 것으로 건강 관리를 했었는데 요즘 다시 산에 다닌다고 하신다. 대학원 시절 같은 전공의 직속 선배로서 누구보다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각별한 형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암벽 등반을 시작해서 결혼 직전에 그만두었다는 형의 경력 때문에 우리는 만나면 자주 등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정작 산에서 함께 할 시간은 잘 나지 않았다. 최근에 다시 등산을 시작하신 형이 내게 연락해와서 어렵사리 시간을 맞추게 된 것이다. 토요일 아침 7시 30분에 구파발역에서 등산복 차림의 형을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형의 동기인 형근이 형도 우연히 만나 반갑게 인사 나누고 보니 마음은 금방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버스 704번을 타고 효자2동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국사당 푯말을 따라 산으로 향한다. 지난 주 설악산 등반에서 줄을 묶었던 박교수님, 유집사님, 은경이가 다시 동행하고 정신이는 중학 동창 산악회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20여 년만에 다시 암벽 등반을 시작하는 기영이 형을 위해 난이도 낮은 숨은벽 등반을 계획했다. 북한산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어서 좋은 풍광 속에서 여유롭게 형과의 첫 산행을 즐기고 싶은 생각에 결정한 코스이기도 하다. 숨은벽 등반을 마치고 상황이 괜찮으면 인수C길 루트로 인수봉 정상에 올라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가는 기영이 형을 따라 옛날 얘기 나누며 오르는 능선길이 녹록치 않다. 자일과 등반 장비를 넉넉히 챙겨 둘러멘 배낭이 무겁게 느껴진다. 지난 한 주를 운동할 여유 없이 연구실 안에서 바쁘게 보낸 탓인지 내 몸은 땀을 비오듯 쏟아낸다.
해골바위 위에서의 조망은 시원하다. 가을날의 청아함이 온전히 전해지는 풍경이다. 지면에 낮게 깔린 안개가 수묵화 같은 원경을 연출한다.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를 또렷히 가르고 있는 숨은벽 능선의 우람한 자태는 여전하다. 능선 양쪽으로 깊게 패인 골짜기의 단풍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가을의 북한산 경치 중에서 으뜸이다. 절경을 즐기며 잠시 숨을 고른 후 숨은벽 대슬랩 밑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오솔길을 걸어간다. 오늘 숨은벽 등반은 우리가 처음인 것 같다. 장비를 착용하고 올려다보는 대슬랩은 항상 위압적이다. 막상 붙어보면 별것 아닌데 선등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몸 상태가 별로라서 그런지 50 미터 길이가 평소보다 멀게 느껴진다. 자일을 고정시키고 유집사님, 기영이 형, 박교수님 순서로 등반한 후 은경이는 자일 회수를 위해 간접빌레이로 오른다.
등반이 시작된 이후는 오히려 힘들지 않다. 자일과 장비 무게에 대한 부담감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왕년에는 날라다니셨을 기영이 형도 처음 등반을 시작하는 사람처럼 긴장감이 상당했을 것이지만 베테랑다운 여유로움을 보여주신다. 형이 해주시는 옛 시절의 등반 환경이나 무용담을 들으며 달라진 장비나 현재의 등반 분위기를 반추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비교적 위험한 구간이라 할 수 있는 고래등까지 안전하게 넘어서서 나머지 구간은 워킹 산행처럼 편안히 끝낸다. 제법 쌀쌀한 가을 바람은 남아 있고 내 몸의 상태는 여전히 별로 좋지 않다. 크랙 등반이 대부분을 차지할 인수C길 루트를 가늠해보면서 등반 결정을 못하고 은경이에게 의향을 묻는다. 은경이도 등반에 대한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땐 등반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라 생각한다.
숨은벽 정상을 지난 곳에서 다섯 명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얘기 나누며 점심을 먹는다. 인수C길 대신 만경대 릿지를 갈까 생각했는데 이 마저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마침 기영이 형도 일찍 하산해야 한다고 하셔서 아쉽지만 오늘 등반은 여기서 접기로 한다. 더 많은 등반을 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텐데 모두들 하산에 흔쾌히 동의해주시니 고마운 마음이다. 산이나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무모한 등반을 감행한다는 것은 사고를 부를 수 있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등반에 임하고 물러설줄 아는 지혜를 발휘할 수도 있어야 한다. 설악산보다 더 곱게 물든 단풍이 있었고, 처음으로 등반을 같이 한 기영이 형과 신뢰감이 흐르는 자일파티가 함께 해서 즐거웠던 숨은벽 등반이다.
1. 23년만에 등반을 다시 시작하신 기영이 형이 2피치를 올라서고 있다.
2. 해골바위 위에서의 조망은 훌륭하다.
3.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를 가르며 서있는 숨은벽 릿지가 우람하다.
4. 숨은벽 릿지 첫 피치인 50 미터 대슬랩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5. 파랑새 릿지의 종착지인 장군봉 아래의 단풍이 곱다.
6. 가을날의 쾌청함 때문에 도봉산 오봉 너머의 원경까지 시원하게 펼쳐진다.
7. 고래등 위에서 내려다보면 숨은벽 능선길이 훤하게 보인다.
8. 인수릿지에도 많은 이들이 붙어있다.
9. 백운대 밑의 호랑이굴 아래의 단풍도 절정이다. 기영이 형에 의하면 예전엔 호랑이굴에서 오버행 등반을 연습했다고 한다.
10. 악어 머리 아래로 뻗어내린 크랙을 따라 선명하게 이어지는 인수C길을 가늠해본다.
11. 숨은벽 릿지의 종착지인 엄지바위.
12. 팥배나무 사이로 인수릿지의 클라이머들이 아득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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