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도 바람은 잦아들지 않고 태풍처럼 강하게 불었다. 유집사님께서 준비해주신 숙소는 정갈하고 아늑해서 전 날 노적봉 등반의 피로를 풀기에 충분했다. 토요일 등반인 만큼 바윗길도 만원일 것을 감안하여 새벽 5시 전에 숙소를 나선다. 단풍을 즐기려는 산객들로 붐비는 설악동 입구는 새벽인데도 북적인다. 세찬 바람이 숲을 흔들고 있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힘찬 갈바람이 하늘을 깨끗이 청소한 탓인지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무수한 별들이 아직은 까만 하늘을 뒤덮고 있다. 지난 여름 알프스 등반 중 발레블랑쉬 설원 위에서 빛나던 별 무리가 생각나 잠시 동안 행복에 잠겨본다. 헤드랜턴 불빛을 따라 비선대까지 이르는 넓은 길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비선산장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밝는다.
비선대에서 마등령으로 향하는 돌계단은 가파르다. 금강굴 갈림길을 지난 우측의 장군봉 바윗길 출발점에는 벌써 한 팀이 등반을 시작하고 있다. 어프로치를 끝내고 유선대 밑의 <그리움 둘> 표지판이 있는 공터에서 장비를 착용한다. 우리보다 먼저 온 한 팀이 등반 중이다. 울산에서 왔다는 그들은 8명으로 구성된 팀인데 그 중에서 초급자가 5명이라고 한다. 피치 중간의 정체는 피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을 느긋하게 먹는다. 울산팀은 1 피치와 2 피치는 생략하고 3 피치부터 등반을 시작한다. 2 피치와 3 피치 사이에 안부가 있어서 거기부터 등반을 시작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 피치부터 차분하게 오르기로 한다. 정신이가 선등이고 내가 쎄컨을 맡는다. 유집사님과 박교수님이 가운데 순서이고 라스트는 은경이 담당이다. 자일은 45 미터와 60 미터 두 동을 이어서 등반하기로 한다. 나와 은경이는 3 년 전에 한 번 이 루트를 등반한 경험이 있고, 다른 세 사람은 모두 처음이다. 첫째 피치는 침니 구간이고 둘째 피치는 비교적 홀드 양호한 짧은 직벽이다. 두 번째 피치 확보점에 이르니 전망이 트인다. 유선대 전체가 한 눈에 조망된다. 우리 뒤로도 두 팀이 등반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3 피치로 끼어드는 팀이 있을까봐 정신이가 먼저 한 줄로 하강하여 울산팀 뒤에 붙는다. 유집사님, 박교수님, 은경이 순으로 등반하고 모두 하강한 후 내가 마지막으로 3 피치 출발점에 내려선다.
셋째 피치는 30 미터 길이의 슬랩이다. 비교적 좁은 슬랩이어서 고도감은 있으나 중간에 길게 세로로 뻗어내린 크랙이 있어서 홀드는 양호하다. 자일 길이를 생각하여 정신이가 선등한 후 쎄컨으로 오르는 나는 주로 슈퍼베이직을 이용해 등반하고, 다른 세 사람은 간접확보로 자일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등반을 이어간다. 넷째 피치는 오버행으로 시작하여 우측 사선 방향으로 올라선 후 다시 좌측 사선 크랙을 따라 오르는 루트이다. 처음 부분의 오버행 구간에서 크랙에 캠 설치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아 선등하는 정신이가 약간 애를 먹은 곳이다. 다섯째 피치 중간부는 언더크랙을 잡고 트래버스 하는 구간으로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횡단하면 날등의 홀드가 나타난다. 이 구간을 무사히 마치면 등반의 재미가 살아나고 이후의 피치들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듯하다.
유선대를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대여섯 피치면 될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전체 등반구간을 합치면 마디를 끊는 방법에 따라 10 피치에서 12 피치에 이르는 짧지 않은 거리를 자랑한다. 트래버스 구간이 있는 다섯 번째 마디 이후에도 그리 녹록치 않은 마디 대여섯 개가 이어진다. 우리 뒤에 오는 팀들에게 조금이나마 정체 현상을 줄여주기 위하여 중간 피치 이후부터는 라스트를 맡던 은경이를 세 번째에 등반하게 하고 박교수님께서 라스트를 담당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은경이가 확보점에 도착한 후 나와 정신이는 다음 피치를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치 중간마다 자일파티가 모두 모여 여유롭게 등반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여러 팀이 한 바윗길에서 등반할 때엔 가능하면 등반 속도를 높여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생각이다.
중간에 모여서 간식 먹을 시간도 없이 부지런히 등반한 까닭에 비교적 이른 시간에 유선대 정상에 도착한다. 전 날 강풍 속에서 긴장감 있게 등반한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중간 이후의 피치에서는 조금 힘겨운 느낌이 들었지만 예상보다 바람이 세차게 불지는 않아서 그나마 즐겁게 등반한 것 같다. 유선대 정상에서의 조망은 말이 필요없다. 천화대의 멋진 암릉부터 천불동 계곡을 호위하고 있는 기암괴석들은 언제봐도 황홀하다. 공기는 맑고 하늘은 쾌청하여 울산암과 속초 앞바다가 손에 잡힐듯 가깝다. 마등령과 세존봉에서 뻗어내린 숲은 가을 색깔이 완연하다. 간식을 나눠먹으며 설악의 절경을 온몸으로 느껴본다. 아름다운 가을의 설악이 우리에게 있어서 감사하다. 그 설악의 바윗길에서 마음 통하는 이들과 자일의 정을 나눌 수 있었음이 크나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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