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

세찬 갈바람 속의 설악산 노적봉 릿지 등반 - 2013년 10월 11일

빌레이 2013. 10. 13. 13:45

가을 날씨는 산행 하기에 정말 좋다. 암벽 등반도 선선한 가을이 제철인 것 같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에서는 설악의 품 속에 안긴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일반 등산객들로 붐비는 정규 탐방로를 벗어나 비교적 한적한 바윗길에서 설악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면 더욱 진한 감동을 받는다. 여유로운 등반을 즐기기 위해 금요일 휴가를 내고 5명이 자일파티를 이룬다. 박교수님, 유집사님, 정신이, 은경이, 나, 이렇게 다섯 명이 정신이의 차에 동승하여 금요일 새벽 6시경에 서울을 벗어난다. 

 

1박 2일의 암벽 등반 코스로 설악산 노적봉으로 이어진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능선과 유선대를 오르는 <그리움 둘> 코스를 계획하고 이미 등반 2주 전에 허가를 받은 상태이다. 설악동에 도착하여 암장허가서 수령함을 뒤져보니 우리 팀의 것이 없다. 아래층의 구조대 사무실에 가서 확인해본 결과 등록은 되어 있는데 아직 출력을 안 한 상태란다. 예전부터 느끼는 바이지만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일처리는 별로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 허가서를 받아들고 비룡폭포 방향으로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단풍을 즐기려는 산객들로 붐비는 소공원과 신흥사로 이어진 길과는 달리 한적함이 느껴진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간에서 올려다보이는 노적봉의 자태가 사뭇 위압적이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은 여러 번 와본 적이 있어 우리 친구들에게는 익숙한 루트이지만 박교수님과 유집사님께는 처음인 곳이다. 등반의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풍광이 수려하고 다양한 형태의 등반을 즐길 수 있는 곳이어서 암벽 초급자가 즐기기에도 무난하여 두 분께는 적당한 코스라는 생각에 택한 길이다. 나와 친구들에게도 부담 없이 설악의 가을을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곳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즐거운 등반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세차게 불어대는 갈바람이 문제였다. 평일이어서 우리 외에 각각 세 명과 두 명으로 구성된 두 팀 밖에 없어서 비교적 한적한 등반이 될 줄 알았지만, 몸이 휘청댈 정도의 강풍은 등반의 여유를 앗아가버렸다. 그래도 즐겁고 안전한 등반을 이어가자는 생각으로 뭉친 팀웍이 아주 좋아서 결과적으로 인상적인 등반이 이루어진 듯하다.

 

내가 선등을 하고 은경이가 쎄컨, 그 뒤로 유집사님, 박교수님 순서로 오르고 정신이가 라스트를 맡는 순서로 등반한다. 장비를 착용하고 있을 때 우리를 추월해서 먼저 첫 피치에 붙었던 두 명의 자일파티는 광주에서 왔다고 한다. 쉽게 사람을 사귀는 정신이의 말에 의하면 둘 중에서 선등을 맡은 이는 나주의 고향집에서 가까운 영산포 사람이라고 한다. 고향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움이 전해진다. 그들은 셋째 피치까지 우리를 앞서가다가 길을 잘 몰라서 그런지 우리에게 먼저 가라고 양보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제일 앞 선 팀이 되고 보니 정체 현상은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에 조금은 부담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래도 낙석이 우려되는 후반부 피치에서 뒤에 있는 것보다는 앞서가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란 생각에 위안을 삼는다.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노적봉 정상부의 암반지대는 자일이 날릴 정도로 심한 바람이 분다. 어느 때보다 홀드를 확실히 잡고 안정적으로 등반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긴장한 것 같다. 세차게 불어젖히는 갈바람 속에서도 모두들 무사히 등반을 마치고 노적봉 정상에 오른다. 연무 현상은 조금 있으나 토왕성 폭포의 절경은 여전하다. 물줄기도 풍부한 편이어서 웅장하고 멋진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상폭의 물줄기는 간간히 바람에 나부껴 안개처럼 흩어지는 장관을 보여준다. 요세미티에 있는 면사포 폭포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갈바람은 여전히 잦아들지 않는 상태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조심조심 클라이밍 다운 구간을 내려온다. 자일 하강 지점까지 내려오는 동안 토왕성 폭포와 토왕골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감상한다. 권금성 너머로는 울산바위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우리 뒤를 따라오던 광주팀의 두 사람까지 우리가 설치한 자일로 하강을 완료 하고 언제나처럼 소토왕골 합수지점에서 탁족을 즐기는 것으로 등반의 대미를 장식한다.

 

박교수님과 유집사님은 처음 접한 외설악의 바윗길 풍경이 두고 두고 남을 것이다. 친구들과 내게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자연이기에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등반은 항상 좋다. 인공 암벽의 단순한 난이도는 자연 환경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기에 생명력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세찬 갈바람이 함께 한 이번의 <한 편의 시를 위한 길>은 분명 예전의 그 길과는 달랐다.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눈보라가 겹쳐진다면 아주 쉽게 오르던 바윗길도 철옹성처럼 느껴질 것이다.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비록 험한 악천후라 말할 수는 없는 강풍이었지만 뜻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자일파티 모두가 즐겁고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