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조용필의 11집 앨범(정확히는 10집 Part 2) B면은 19분 56초 분량으로 국내 최장 플레잉타임을 기록 중인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이란 제목의 노래 한 곡으로 채워져 있다. 이 노래는 내가 학부 졸업과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한창 방황하던 시기인 1989년 1월에 발표되었다. 처음 듣던 그 순간부터 내 심금을 울렸던 이 노래는 숙명적으로 주어진 삶을 생이 다하는 날까지 두려움 없는 탐험과 성찰로 혼신의 힘을 다해 헤쳐 나아가고자 절규하는 인간적 고뇌를 그린 대서사시 같은 가사에 화려하고 웅장한 선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명곡이 아닐 수 없다.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의 긴 노랫말을 다 외울 수는 없지만, 이번 미국 등반여행을 다니는 동안 문득문득 이 노래가 생각나 속으로 읊조리게 되었다. 조용필의 나레이션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구절들 중 자주 떠올랐던 부분을 여기에 옮겨본다.
아침이면 하나님은 한장의 도화지를 주신다.
얘야 이 도화지에 멋진 너의 여름을 그려보렴.
사랑의 여름, 영광의 여름, 행복의 여름.
그러나 도화지엔 무수한 암초만이 그려진 채 소년의 여름이 구겨지고,
청년의 여름이 실종되고, 그리고 여름은 또 시작된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본다.
혼자 있을 수도 없고, 혼자 있지 않을 수도 없는 도시의 하늘.
권태로움과 공포로 색칠된 도시의 하늘.
오늘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창피하게 한다.
떠나자.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아니, 진실로 짐승이 되기 위해서
어딜 가니? 어딜 갈 거야? 옆에서 친구가 불안을 담고 묻는다.
먼 곳을 가겠어. 먼 곳을.
이것 봐 그런 생각은 사춘기가 끝나면서 같이 끝나는 거야
아니야 사춘기란 끝나는 것이 아니야.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희망이야.
어떤 폐허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드는 희망.
우리 마음 한구석에 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는 그곳.
그리움을 주고, 활력을 주기도 하는 그곳.
이 답답하고 숨막히는 도시를 떠나서 그런 먼 곳으로 가고싶다.
가자 사랑을 찾아서
가자 영광을 찾아서
행복을 찾아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인 파랑새를 찾아서
'미국 서부와 요세미티 등반여행'은 나에게 "사랑의 여름, 영광의 여름, 행복의 여름"으로 2024년 여름을 추억하게 해줄 것이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이번 여행이 단순히 해외 암벽등반에 대한 소망을 채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정대 6명의 구성원 중 나만 유일하게 홍대클라이밍센터 소속이 아니었다. 기영형과 윤선생님은 익히 잘 아는 사이였지만, 세 YB 친구들과는 교류가 전혀 없었기에 서먹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출발 전부터 원정대의 게스트 자격으로 참석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자연스레 나도 원정대의 손님 신분이 아닌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물론 오랜 세월 함께 해온 기영형 덕택에 쉽게 원정대에 녹아들 수 있었지만, 윤선생님과 YB 친구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에서의 15박 16일 동안 삼시 세끼를 함께 나누고, 밤이면 캠프사이트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맥주 한 잔 기울이면서 무협지보다 흥미진진한 등반관련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 순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장편소설 분량으로도 부족할 윤선생님의 등반 회고담을 듣는 순간이 내게는 그 어떤 영화나 TV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수의 산서들을 통해 얻은 간접 경험만으로 쌓은 나의 알량한 등반지식을 한순간에 부끄럽게 만드는 윤선생님의 생생한 체험담이 내 귀에 쏙쏙 박혔던 것이다. 다시 조용필의 노래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로 돌아와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지막 부분의 가사를 상기해 본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낭랑한 물소리
작은 난로 위에 끓고 있는 보리차 물주전자
햇볕이 가득한 마당에 눈부시게 널린 하얀 빨래
정답고 따듯한 웃음 속에 나는 왜 눈물이 나나
언제라도 나는 변명 없이 살아가고 싶었네
언제라도 나는 후회 없이 살아가고 싶었네
대문 밖을 나서는 남자의 가슴을 겨냥한 활시위
그렇더라도 나는 갈 수 밖에 없네 신비한 저쪽
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
대문 밖을 나서는 순간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는 모험과 탐험의 여정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갈 수 밖에 없는 신비한 저쪽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돌아오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곳에서 받은 환희, 영광, 행복을 말해야 한다. 벨지움 태생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의 동화 같은 희곡 작품인 <파랑새>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진정한 행복임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도 돌아올 집과 일상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 의미가 남다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국 등반여행은 나에겐 "그리고 그 모든 것인 파랑새"를 찾은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낯선 이국땅에서 정말 좋아하는 암벽등반을 마음껏 즐겼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일상을 살아가다가 등반지에서 반갑게 마주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미국 등반여행에서 얻은 저마다의 유익한 에너지는 우리 6명의 구성원들 모두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것이다. 평소 내가 산에 다니면서 좌우명처럼 마음 속에 새기고 있는 다음 구절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 이번 등반여행이 내 인생에 또 하나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알프스와 샤모니를 사랑했던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의 명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의 본보기는 세상에서의 출세 여부는 하늘에 맡긴 채,
자기는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더 많은 부보다는 더 소박한 쾌락을,
더 높은 지위보다는 더 깊은 행복을 추구하기로 마음먹고,
마음의 평정을 제일 중요한 재산으로 삼아,
평화로운 생활에 대한 무해한 자부심과 평온한 추구에서 명예심을 느끼는 사람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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