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해외등반여행

[2024 미국 서부와 요세미티 등반여행 - 5] El Capitan, 'East Buttress'

빌레이 2024. 7. 23. 11:08

엘캐피탄(El Capitan)은 요세미티 계곡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장엄하고 압도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거벽(big wall)이다. 엘캐피탄 수직 절벽의 높이는 9백 미터가 넘고 정상의 해발고도는 2,308 미터에 이른다. 스페인어 '엘까피딴(El Capitán)'을 영어로 옮기면 'The Captain'이니 우리말로는 '장군봉'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 이름에 걸맞게 엘캐피탄은 현대 암벽등반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거벽등반의 성지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암벽등반 장비가 엘캐피탄을 비롯한 요세미티의 암벽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스티브 로퍼가 쓴 책인 <캠프4>의 내용을 빌리자면, 1958년 11월 12일, 워렌하딩(Warren Harding)이 이끄는 등반팀에 의해 도전이 시작된지 1년 4개월 만에 거대한 수직 암벽의 초등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엘캐피탄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경외롭고 아름다운 대자연의 풍경 중 하나로 머물러 있었지만, 초등이 이루어져 등반이 가능하다는 게 입증된 이후로 이 엄청난 화강암 덩어리는 클라이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내가 13년 전에 관광객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보았던 엘캐피탄이 단지 경이로운 풍경 중 하나였다면, 이번에 등반할 클라이머의 입장에서 다시 올려다 봤을 때 들었던 위압감은 초등 당시의 등반가들이 느꼈을 막연한 두려움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감정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스트 버트레스(East Buttress)'는 엘캐피탄에 개척되어 있는 70여 개의 등반루트들 중에서 지금 내 수준의 초·중급 클라이머들도 자유등반 방식으로 하룻만에 엘캐피탄 정상부에 다녀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코스일 것이다. 우리팀은 7월 3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캠프4를 출발하여, 04시 45분 즈음부터 어프로치를 시작했다. 기준이 되는 '노즈(Nose)' 루트 오른쪽인 엘캐피탄 동남벽의 너덜지대를 올라서서 잠시 쉰 후에 동쪽 끝에 자리한 '이스트 버트레스' 루트의 출발점에 도착하니 05시 55분이었다. 장비를 착용하고 선등자인 윤선생님이 첫 피치 등반을 시작한 시간은 06시 15분, 라스트를 맡은 내가 5명의 팀원 중 마지막으로 정상을 밟은 시간은 오후 16시 55분, 모두가 하산하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아직 일몰 전인 18시 55분이었다. 순수한 등반시간만 10시간 30분, 어프로치와 휴식 및 하산을 포함한 전체 등반시간은 14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등반안내서 상에는 13피치로 나와 있는 '이스트 버트레스'를 우리는 9피치로 끊어서 올랐다. 어느 한 피치도 호락호락 하지 않았고, 매 피치가 50미터에서 60미터에 이르는 긴 거리여서 체력 안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땡볕에 노출된 시간이 많아서 1.5 리터를 준비해 간 식수는 7피치에서 바닥이 났고, 그 이후론 입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산길에 설치된 고정로프가 많아서 예상보다 일찍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프로치를 시작한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엘캐피탄. 정상부에서 뻗어내린 '이스트 버트레스'가 아침 햇살을 받아서 선명히 빛나고 있다. 이 사진은 '머뉴어파일 버트레스'에서 등반하던 날인 7월 1일 아침 06시 50분 즈음에 촬영한 것이다.
▲ 7월 3일 새벽에 어둠을 뚫고 어프로치에 나선 후, 너덜지대에 진입하자 서서히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 가까이 다가설수록 엘캐피탄 동남벽의 깍아지른 수직 절벽의 위용은 대단했다.
▲ 수직의 거벽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도저히 오를 수 없을 듯한 위압감이 들었다. 멀리서 바라볼 때의 압도적인 풍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 말로만 듣던 'Zodiac' 루트 언저리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올려다 본 거벽은 아무리 인공등반 방식이라도 선뜻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 수직의 거벽을 뒤로 하고 우리는 자유등반 방식으로 오를 수 있는 '이스트 버트레스'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 저기 보이는 작은 숲 속에 '이스트 버트레스' 루트의 출발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06시 15분 무렵에 윤선생님의 선등으로 대망의 '이스트 버트레스' 등반이 시작됐다.
▲ 윤선생님께서 긴 침니가 이어진 루트의 까다로운 구간을 잘 넘어서서 1피치 확보점에 안착하셨다.
▲ 기영형이 두 번째로 오르고... 1피치는 처음부터 침니를 올라서야 하는 불편한 동작들이 연속되는 쉽지 않은 코스이다.
▲ 가을씨가 세 번째 등반자...
▲ 네 번째 등반자인 아란씨도 긴장감 속에 화이팅을 다짐하고...
▲ 라스트를 맡은 나는 아란씨에게 부탁하여 어색한 기념사진을 남긴다.
▲ 엘캐피탄의 '노즈' 전체에 아침 햇살이 비출 때인 08시가 다 될 무렵에서야 나는 첫 피치에 붙을 수 있었다.
▲ '이스트 버트레스' 루트의 1피치는 배낭을 확보줄에 매달고 몸째밍을 해야 하는 애매한 넓이의 침니 구간이 길게 이어졌다. 마지막 구간에서는 스태밍 자세로 올라서야 했다. 가이드북에 기록된 난이도는 5.9인데, 50미터로 길게 이어지는 침니 등반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 '이스트 버트레스' 1피치 확보점 모습.
▲ 1피치 확보점에서 바라본 2피치 초반부. 페이스 구간이 까다로워 윤선생님께서 많은 캠을 사용하여 후등자들이 쉽게 오르도록 조치해 놓으셨다.
▲ 확보점에서 살펴보니 홀드를 잘 찾으면 쉽게 돌파할 수 있을 듯하여 2개의 캠만 남기고 먼저 회수하여 아란씨에게 넘겼다.
▲ 그런데 2피치는 초반부의 페이스 구간을 넘어서 나타난, 일명 물통 크랙 구간이 정말로 까다로웠다. 발째밍도 잘 안 먹히고, 스태밍 자세를 취하기도 애매해서 등반기술은 제쳐두고 본능에 의해 막무가내로 올라야 했다. 물통 크랙을 사진에 담고 싶었으나,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용을 쓰느라 경황이 없었다. 위 사진은 물통 크랙을 통과한 직후에 한숨 돌릴 수 있는 곳에서 2피치 상단부를 찍은 것이다. 가이드북 상에는 2피치가 '이스트 버트레스' 전 구간 중에서 최고 난이도인 5.10b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내가 체감한 난이도는 이보다는 한참 어려웠다.
▲ 2피치 확보점에 닿기 직전의 모습이다.
▲ 2피치 확보점은 캠과 웨볼렛(Web-O-Lettes)으로 윤선생님께서 구축해 놓으셨다.
▲ 3피치를 등반 중인 가을씨의 모습. 선등과 쎄컨을 맡으신 윤선생님과 기영형은 라스트를 맡은 나와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 까다로운 1, 2피치를 잘 통과했으니, 3피치는 쉽겠지 생각하면 이 또한 오산이다. 아란씨가 3피치 초반부터 까다로운 크랙 구간을 넘어서고 있다.
▲ 3피치 확보점 모습.
▲ 3피치 확보점에서 올랴다 본 4피치 모습.
▲ 아란씨가 4피치를 오르는 동안 확대해서 보니... 윤선생님은 벌써 5피치 후반부를 등반 중이었다.
▲ 그늘진 3피치 확보점에서 기다리는 동안 내려다 본 요세미티 밸리와 머세드 강은 한없이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 4피치 확보점에서 올려다 본 5피치, 가을씨의 등반 모습.
▲ 6피치 사선크랙을 선등 중인 윤선생님의 모습이 아스라히 보인다.
▲ 내가 4피치 확보점에 도착하기 직전이다.
▲ 4피치 확보점 모습.
▲ 5피치 확보점에서 올려다 본 6피치, 가을씨가 보기보다 까다로운 사선크랙을 잘 통과 중이다.
▲ 5피치 확보점부터는 땡볕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란씨와 함께 'TC프로' 암벽화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엘캐피탄의 수직 거벽을 배경으로... 내 것은 구형인데, 신형인 아란씨의 'TC프로' 복숭아뼈 부분엔 엘캐피탄 '돈월(Down Wall)'과 '프리라이더(Free Rider)' 루트가 디자인 되어 있다.
▲ 까다로운 6피치 사선크랙을 잘 돌파하고 도착한 확보점.
▲ 가을씨가 7피치를 등반 중이다.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이 구간부터 다들 힘들어 했다. 우측의 그늘진 크랙에서 페이스로 트래버스 하는 구간이 상당히 까로웠다.
▲ 7피치 확보점에서 바라본 8피치, 하프돔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 7피치 확보점에서는 멀게만 느껴지던 엘캐피탄 정상부가 가까워진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 아란씨가 8피치 등반에 나서고 있다. 조망은 훌륭하지만 그만큼 고도감이 쩌는 구간이기도 하다.
▲ 8피치는 초반부의 우상향 트래버스 구간을 넘어서 살짝 클라이밍 다운한 후에 페이스에 붙어야 한다.
▲ 아란씨가 마지막 9피치 등반에 나서고 있다.
▲ 8피치 확보점에서 바라본 요세미티 밸리와 하프돔.
▲ 8피치 확보점에서 내려다 본 미들캐시드럴록과 주변의 침봉들...
▲ 마지막 9피치 확보점은 정상부의 나무에 슬링 하나로 구축되어 있고...
▲ 9피치 확보점에 오르니 '쓰리브러더스(Three Brothers)'가 눈앞에 펼쳐지고 저 멀리 로열 아치스와 하프돔까지 선명히 잘 보인다.
▲ 사실상의 등반이 끝나고 9피치 확보점에서 좀 더 걸어 올라가니...
▲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나를 환영해 주신다. 이때가 16시 55분.
▲ 해가 지기 전에 하산을 완료하기 위해 다들 피곤한 몸을 움직여 본다.
▲ 하강 구간에 고정 로프가 설치되어 있어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 고정 로프는 어센더로 오르기 위한 스태틱 로프로 하강하기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 그래도 고정 로프 덕택에 하산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었다.
▲ 일몰 시간 전인 18시 55분에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엘캐피탄 동남벽의 등반 루트들. 맨 오른쪽에 '이스트 버트레스'가 보인다.
▲ 등반 가이드북인 <Yosemite Valley Free Climbs>에 소개되어 있는 엘캐피탄의 멀티피치 자유등반 코스는 '이스트 버트레스'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