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영국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는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그의 대표작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은 올해의 읽고 싶은 소설책 목록에 들어 있어서 꽤 오래 전에 구입해 놓았는데, 이 사실을 깜빡하고 하마터면 다시 구입할뻔 했다. 다행히 책장에 있다는 것이 내 눈에 띄게 되어 세밑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2021년 12월의 마지막 주간을 <남아 있는 나날>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깊이 있고 유려한 문장 속에서 독서의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었다. 이 작품은 1994년에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책을 읽은 후에 기회가 닿는다면 영화도 꼭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너무 자극적이고 잔인한 영상과 문학작품이 판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벗어나 고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이러한 작품이 영미권과 달리 우리나라의 출판물에선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게 불만스러운 대목이긴 하다. 소설 속의 문장을 빌려 단편적으로나마 분석해 보자면, 지금의 우리 사회가 선과 정의의 승리를 희구하기보다는 탐욕과 이익을 우선 순위에 두는 지나친 '프로페셔널리즘'에 빠져있기 때문은 아닐까?
소설의 주인공 스티븐스는 영국에 있는 대저택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2차세계대전 중의 혼란스러운 국제정세 속에서 각국의 고위 정치인들 사이에 비밀회담이나 막후협상이 이루어지던 대저택인 달링턴홀에서 스티븐스는 지금으로 말하면 일류 호텔의 총지배인 같은 위치에서 세계사의 중대한 순간들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는 거의 평생을 모시던 달링턴경이 죽고 저택은 쇠락하여 미국인 부호인 패러데이경에게 넘어간 상태이다. 소설은 새로운 주인인 패러데이경으로부터 일생에서 거의 처음으로 일주일 간의 휴가를 받은 스티븐스의 여행 궤적을 따라가면서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특별히 드라마틱한 장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나날>을 다 읽고 나면 왜 이 책이 현대문학의 고전 반열에 올라 있는지, 가즈오 이시구로가 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선정되었는지를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한 해를 돌아보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고자 하는 이 시점에서 이 책만큼 어울리는 작품도 드물지 싶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도에 생각하는 고향의 봄 (0) | 2022.04.17 |
---|---|
다시 돌아온 캠퍼스의 봄날 - 2022년 4월 11일(월), 14일(목) (0) | 2022.04.15 |
[독후감] 김기섭 시집 <달빛 등반> (0) | 2021.11.08 |
부채 (0) | 2021.08.01 |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0) | 2021.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