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트레킹

청룡능선으로 올라 백호능선으로 내려온 운악산 - 2016년 3월 12일

빌레이 2016. 3. 12. 21:44

세기의 대결이라고 해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바둑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이 결국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에 3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대국을 앞두고 가졌던 인터뷰에서 이세돌 9단은 5대 0 승리를 장담할 정도로 자신만만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지금으로선 남은 4국과 5국에서 한 판이라도 이겨주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듯한 형세다.(이 글을 다듬고 있는 시점에서 이세돌 9단은 감동적인 투혼을 발휘하여 4국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번 대결을 단순히 바둑 승부로 보자면 감정적으로 대할 수 있겠지만, 인공지능 기술의 현재 상태를 가늠하는 흥미로운 공학적 실험 정도로 간주하는 것이 합리적인 시각이라는 생각이다. 애초부터 승부에 상관 없이 5번의 대국을 갖기로 한 것도 구글 측에서 5번의 실험을 계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반적인 바둑 승부라면 4차전과 5차전은 열리지 않았어야 한다.


과학기술의 편리함 이면에는 좋은 기술을 악용하는 폐해가 반드시 뒤따르게 된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첨단 기술의 올바른 이용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보다 깊이 있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운악산 청룡능선을 오르면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상념에 잠겨본다. 개강과 함께 분주해진 일상의 묵은 때를 맑은 자연 속에서 씻어보고 싶지만 마음은 여러 가지로 무겁다. 우스운 얘기지만 개인적으로는 인류의 과학 문명이 지금의 수준에서 멈추면 좋겠다는 공상을 해본다. 세상에 공짜 없다고 어떤 기술이든 순기능과 역기능은 항상 공존한다. 현재의 과학기술 문명은 그 헤게모니를 쥔 자들에게 부와 권력이 너무 쏠려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두서 없이 하다보니 가파른 청룡능선의 험로를 힘들다는 느낌도 없이 오른다. 눈썹바위 아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신 후, 곧장 병풍바위와 미륵바위를 지나쳐 만경대 위의 동봉 정상에 도착한다. 두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되었다.


포천군과 가평군에서 각각 세운 두 개의 정상석이 있는 운악산 동봉 아래에서 간식을 먹고 백호능선으로 향한다. 현등사와 대원사를 넘나드는 절고개를 지나서 이어지는 백호능선의 산길은 운악산이 바위산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순한 오솔길이다. 처음 산을 오를 때부터 흐렸던 하늘에서는 이내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능선 말미의 봉우리에 있는 데크에서 점심을 먹는 동안 내리던 눈은 함박눈으로 변한다. 그다지 춥지 않은 날씨에 쏟아지는 함박눈에 기분이 좋아지고 포근함마저 느껴진다. 하산길 끝지점에서 만난 계곡물은 힘차게 흘러내린다. 겨우내 얼었던 계곡이 거의 다 녹아 내렸다. 청아한 물소리 속에는 봄의 생동감이 담겨있다. 어느새 그친 함박눈처럼 꽃피는 봄 또한 우리 곁에 불현듯 찾아들 것이다.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는 듯 답답한 우리네 일상도 다가올 따스한 봄기운에 녹아내려 훈훈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