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북부간선도로에 들어선다. 주말을 맞아 봄나들이 가는 차량 행렬로 이른 아침부터 도로는 지체와 정체의 반복이다. 아차 싶었다. 해마다 이맘 때 주말은 교통량이 폭증한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것이다. 2주 전 양수리 주말 나들이 때 겪었던 극심한 교통체증의 기억이 떠오른다. 양평의 중원산과 도일봉 산행을 계획했던 원래의 생각을 바꾸기로 한다. 행락객들이 몰릴 것이 뻔한 도로를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난 번 운악산 산행 때 답사해 두었던 청계산 일대를 가보기로 한다. 다행히 정체가 거의 없는 47번 국도를 쌩쌩 달려 포천시 일동면소재지에서 청계산 입구로 접어든다. 청계저수지 둘레를 돌아가는 길을 따라서 가다가 등산안내도가 있는 삼거리 주변에 주차한다.
안개 자욱한 날씨에 고즈넉한 풍경의 청계호수를 뒤로하고 길마골을 따라 올라간다. 길 주변에 예쁜 펜션들이 즐비하다. 대한민국 7대 생태보전지역이라는 푯말도 보인다. 펜션이 끝나는 곳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울창한 침엽수림 속의 신선함이 전해진다. 계곡 주변엔 진달래가 한창이다. 평온한 기분에 잠겨 무심코 걷고 있는데 좌측 산허리께에서 갑자기 요란스런 들짐승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새끼들을 포함해서 열 마리는 넘을 것으로 보이는 멧돼지 무리가 숲속의 평화를 깨는 굉음을 내면서 가파른 경사면을 잽싸게 가로지른다. 순간적으로 바짝 경계하는 마음이 생긴다. 멧돼지 무리를 두 눈으로 본 이상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들짐승과 조우했을 때 어찌해야 한다는 정도의 요령은 알고 있으나 실제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지는 별개의 문제다.
멧돼지를 다시 만나면 침착하게 대처하리라 마음 먹고 산행을 이어간다. 청정한 계곡의 물소리는 우렁차고 등로 주변은 들꽃 천지다. 햇살 좋은 날씨였다면 야생화 촬영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흐린 하늘이 야속하지만 잠시나마 희미하게 열리는 따스한 햇빛 속에 몇 컷 찍어본다. 이제는 시력이 나빠져 디지털 카메라의 LCD 화면에 재생된 그림의 촛점이 맞는 지의 여부도 알기 힘들다. 미러리스 카메라로 대충 여러 컷을 찍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다. 이럴 땐 DSLR 들고 산을 누비던 때의 열정이 그립다. 산행과 출사를 동시에 하기란 힘든 일이다. 등산할 땐 사진에 욕심 부리지 않고 그 순간의 느낌이나마 남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발 밑에 깔려 있는 야생화들의 예쁜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에 빠져 산책하듯 지나온 계곡을 벗어나 길마재에 올라선다. 한북정맥길에 속한 길마재에서 간식과 함께 한가로운 휴식을 즐긴다. 우측의 길매봉은 제법 가파른 암봉이다. 청계산 정상으로 향하는 반대편도 만만치 않은 된비알이다. 휴식을 마치고 막 출발하려는데 진행해야 하는 청계산 정상 부근의 숲속에서 들짐승의 굉음이 들려온다. 무슨 공룡이 울부짖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산 전체에 메아리친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 소리를 자세히 들어본다. 아무래도 멧돼지 무리들이 서로 싸우는 듯한 소리다. 그 중의 한 무리는 계곡을 올라오면서 보았던 그 놈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가야할 길과 같은 방향에서 그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으니 선뜻 출발하지 못하고 잠시 기다려보기로 한다. 한참 동안 들리던 굉음이 어느 정도 잦아들고 나서야 청계산 정상으로 향하는 한북정맥길을 따라 가파른 경사면을 오른다.
한북정맥 구간 중에 가보지 못했던 길을 걷는다는 설레임은 있다. 다만 멧돼지가 출몰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짙은 안개 속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답답함에 조금은 위축된 마음이 신경쓰인다. 한북정맥길을 걷다보면 주변 산군을 둘러보는 장쾌한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앞의 봉우리도 볼 수 없는 시야가 야속할 뿐이다. 청계산 정상석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강씨봉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 가다보면 좌측으로 하산길이 보일 것이란 막연한 기대는 허사였다. 귀목봉과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잠시 휴식한 후 오뚜기령에 도착할 때까지 청계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을 알리는 푯말이나 적당한 탈출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뚜기령 직전의 한우리봉에서 희미한 내리막길이 보였는데 나중에 지도상에서 확인해본 결과 이 길은 자연스럽게 청계저수지로 이어질 것 같았다.
낙엽송 군락이 있어서 이채로운 경관을 보이는 오뚜기령 주변을 여기저기 구경한 후에 포천시 일동 방향의 이정표를 보고 임도를 따라 내려온다. 심한 낙석으로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인 구간이 나타난다. 다행히 사람들은 건너다닌 흔적이 뚜렷하고 더이상의 낙석도 발생하지는 않을 듯하다. 낙석지대부터는 임도를 잠시 벗어나 지능선 위의 오솔길로 접어든다. 내려오는 동안 진달래꽃 군락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 진달래꽃은 임도에 다시 내려선 다음에도 계속 이어진다. 임도 끝자락의 민가 주변에서는 축사의 가축 분뇨 냄새로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에 진입한 후로 청계저수지 아랫마을인 기산리까지 다소 지루한 길을 걸어간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를 걷는 것이 그다지 좋을리는 없지만 차량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한가로운 주변 농가를 구경하며 걷는 기분이 싫지만은 않다.
기산리 마을을 지나니 예상 대로 청계저수지의 둑이 보인다. 차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청계저수지 호반의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예상보다 크고 아름다운 호수를 구경하면서 둘레길을 따라 걷는 기분이 참 좋다. 침엽수들 사이로 비치는 호수의 맑은 물은 캐나디언 록키의 여느 호수가 연상될 정도로 깨끗해 보인다. 다소 먼 길을 돌아서 왔지만 청계호수를 제대로 둘러보았다는 만족감이 남는다. 조망이 좋았더라면 한우리봉에서 자신감 있게 청계저수지로의 하산길을 개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온통 운무 속이었던 산속에서 먼 길을 돌더라도 또렷한 등산로를 택했던 것은 지혜로운 판단이었다는 생각이다. 8시간 가까이 꾸준히 걸었던 탓에 모처럼 두 다리가 뻐근하다. 기분 좋은 뻐근함이다. 처음 오른 청계산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래서 더욱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산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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