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의 순두부집에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팔공산 무인 산장으로 향한다. 산 속에서 밤을 보낸다는 것은 항상 가슴 설레는 일이다. 염불암 근처의 산장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렌턴 불빛 아래에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청정한 알프스에서 허 선생님이 직접 따온 마가목 열매로 담근 술 한 잔에 마음이 달뜬다. 황금빛을 발하는 마가목주는 그 빛깔만큼이나 아름다운 순간을 더욱 빛나게 해준다. 연경 암장에서의 등반과 기분 좋은 취기에 꿀잠을 잔다. 새벽에 잠을 깨어 산장 주위를 돌아 염불암까지 산책을 다녀온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적절히 섞인 숲속을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인적 없는 암자의 샘터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툇마루에 앉아 산사의 고즈넉함을 즐겨본다.
모닝 커피 한 잔을 곁들인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꾸려 병풍바위를 향해 오른다. 암벽 등반 장비와 캠핑 용품까지 들어 있는 허 선생님의 배낭은 육중해 보인다. 손님이라는 이유로 나에게 짐을 맡기지 않아 상대적으로 가벼운 내 배낭을 보면서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등산학교를 갓 졸업해서 허 선생님과 처음으로 자일을 묶고 등반에 나섰던 기억이 또렷한 병풍바위에 도착한다. 감회가 새롭다. 등반에 필요한 장비를 제외한 나머지 짐은 바위 밑에 남겨두고 이백리길 등반에 나선다. 허 선생님은 식수와 행동식을 비롯한 등반 필수품을 담은 배낭을 짊어진 채 선등에 나선다. 아내인 장 선생님이 선등자 빌레이를 보고 쎄컨으로 오른 후 내가 라스트를 맡는다. 등반 과정을 카메라에 담으며 지켜보는 두 사람의 등반 모습이 아름답다.
병풍바위 우벽 아래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사선 방향으로 진행하는 이백리길은 여덟 개의 마디로 구성된다. 직벽과 오버행을 이루는 크랙과 슬랩이 산재해 있고 선등자에게 부담스러운 트래버스 구간도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등반을 즐길 수 있다. 허 선생님의 안정되고 침착한 리드 덕택에 산새들의 영롱한 지저귐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평온한 등반이 이루어졌다. 구호 소리 요란하고 훈수꾼들의 재잘거림이 소란스러운 바윗길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기분이다. 우리가 등반하는 동안 바위 주위에서 인기척 하나 느낄 수 없었을 정도로 조용했다. 팔공산의 자연 속에 온전히 동화되어 안전한 등반에 필수적인 구호 외에는 말 없이 등반에 집중했던 그 순간이 좋았다. 아직 등반 능력이 부족한 내게는 몇몇 어려운 구간이 있었지만 후등이라는 편안함 때문인지 시종 즐겁게 등반할 수 있었다.
알프스에서의 등반을 포함하여 허 선생님과는 세 번째로 줄을 묶었다. 함께 등반할 때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보고 배운다. 이번엔 허 선생님의 아내인 장 선생님이 합류하여 부부가 자일파티를 이룬 보기 좋은 모습을 곁에서 대할 수 있었다. 물리적으로 하나의 줄을 묶는다는 건 분명 특별한 일이다. 묶여진 그 줄을 통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흐른다면 더욱 각별할 것이다. 내가 꿈꾸는 자일파티와 등반의 한 전형을 보고 그 속에서 함께 등반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는 것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이백리길 등반을 완료하면 팔공산 주능선이다. 일반 등산로를 통해 병풍바위로 돌아오는 길에 허 선생님의 후배 산악인인 고 황기용 씨의 추모비를 찾았다. 병풍바위를 옆에서 보고 있는 전망 좋은 곳에 세워진 추모비에서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 시종일관 조용하고 아늑한 환경 속에서 행해진 우리 셋의 이백리길 등반이었다. 천국에서 내려보았을 황기용 씨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1. 이백리길 셋째 마디를 등반 중인 허 선생님. 트레버스 구간이라 선등자에겐 부담감이 클 것이다.
2. 산장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병풍바위로 향한다.
3. 오랜만에 다시 찾은 병풍바위는 여전히 위압적이다.
4. 병풍바위 우측이 이백리길 출발 지점이다.
5. 첫째 마디는 직벽 크랙이다.
6. 첫째 마디 후반부를 등반 중인 장 선생님. 두 분의 등반 모습이 아름답다.
7. 둘째 마디는 디에드르 크랙이다.
8. 둘째 마디 확보점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병풍바위의 위용.
9. 이백리길 우측의 풍경도 아름답다.
10. 셋째 마디는 우측 사선 방향으로의 트래버스 구간이다.
11. 넷째 마디는 디에드르 크랙과 오버행 턱을 넘는 구간이다.
12. 오버행 턱을 넘어설 때는 한 손으로 슬링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모서리의 든든한 홀드를 잡고 일어서야 한다.
13. 보통 두 피치로 끊어 등반하는 구간인 다섯째 마디는 크랙 등반 이후 슬랩이 이어지는 구간이다.
14. 허 선생님이 여섯째 마디를 리드 등반 중이다. 머리 위로 보이는 청단풍이 인상적이다.
15. 마지막 마디 초반부는 페이스 구간이다.
16. 페이스 구간에서는 슬링에 발을 끼우고 일어서면 된다.
17. 라스트 피치 정상에 안착한 허 선생이 등반 중인 아내를 확보 중이다.
18. 이백리길 정상에서 내려다본 팔공산의 푸르름이 시원스럽다.
19. 등반을 마치고 병풍바위 밑으로 가기 위해 팔공산 주능선 상의 짧은 릿지를 오른다.
20. 병풍바위 옆 전망 좋은 곳에 산악인 고 황기용 씨의 추모비가 있다.
21. 이백리길 정상에서의 기념 사진. 허 선생님과 함께 한 등반은 항상 즐겁고 매번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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