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3840 미터의 에귀디미디 전망대에서 설릉으로 나서는 얼음 동굴 앞이다. 등반장비를 착용하는 산악인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허긍열 님과 성항경 님의 옆에서 나도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아이젠을 빙벽화에 단단히 고정시킨다. 케이블카를 타고 여행자 차림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신기한듯 우리들을 쳐다본다. 관광객들 속에서 삼 년 전 알프스 트레킹을 위한 목적으로 샤모니에 왔을 때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카메라 둘러메고 혼자 트레킹 하던 그때는 보기 드문 광경이라면 어느 것이든 사진으로 남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아슬아슬한 설릉 위를 걸어서 내려가는 사람들이 이채롭게 보였었고 여지없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었다. 그 당시 카메라의 뷰파인더 속에 있던 등반가들 중 한 명처럼 내가 직접 설릉 위를 걸어간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내가 찍어두었던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신비한 상상까지 하게된다.
세 사람이 안자일렌을 하고 설릉 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몽블랑 산군의 하얀 설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대자연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다. 전망대의 인공 구조물 속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우주로 공간이동 하는 느낌이다. 불과 몇 발짝 옮겼을 뿐인데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양쪽 사면은 깍아지른 설벽이고 날등 위로는 먼저 내려간 사람들에 의해 다져진 눈길이 오솔길처럼 좁다랗게 형성되어 있다. 설릉 위를 내려가는 동안 내가 맨 앞이고 중간이 성선생님이다. 허선생은 맨 뒤에서 자일로 연결된 우리 두 사람이 내려서는 것을 확보하면서 사진 촬영까지 하신다. 내리막 설릉의 기울기가 높은 곳은 계단처럼 눈이 깍여져 있어 발걸음 옮기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 긴장감 속에 경사진 설릉을 한 발 한 발 내려오니 어느새 완만한 설원이다. 아이젠을 딛고 걷는 발걸음도 서서히 익숙해진다. 비로소 몽블랑 산군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들에게 좀 더 좋은 풍광을 보여주기 위해 허선생은 야영지인 발레 블랑쉬 설원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배낭을 내려놓게 한다. 가벼워진 몸으로 에귀뒤플랑 방향으로 이어진 능선 위를 걷는다. 현지 산악인 두 명이 우리 앞을 내려가고 있다. 그들의 우측 너머로 그랑드조라스에서 당뒤제앙까지 이어진 산줄기가 손에 잡힐듯 가깝게 보인다. 몽블랑 산군의 침봉들이 그림처럼 펼쳐진 경치는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 더 이상 내려가기 위험한 능선 위에 멈춰서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돌아선다. 배낭을 벗어둔 갈림길에서 짐을 챙겨 발레 블랑쉬로 향한다. 드넓은 호수가 얼어붙은 후에 하얀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발레 블랑쉬 설원은 평화롭고 광활하다. 코스믹 릿지에서 가까운 곳에 야영할 장소를 찾아든다. 누군가 텐트를 친 흔적이 뚜렷하여 파헤친 눈으로 자연스레 바람막이 담장이 설치된 곳이다. 이런 곳이 없을 경우엔 허선생이 챙겨오신 눈삽을 이용해 한참 동안 캠핑사이트를 만들어야 했을텐데 운이 좋은 편이다. 바닥만 간단히 골라서 평평하게 다진 후 손쉽게 텐트를 설치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신다.
예상보다 일찍 캠프를 차린 탓에 점심 먹고 출발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짧은 휴식 후 곧바로 코스믹 릿지 등반에 나선다. 허선생의 배낭에 간식과 물을 챙기고 성선생님과 나는 피켈 하나만을 손에 쥔채 출발한다. 코스믹 동계 산장이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된다. 허선생의 리딩 하에 성선생님과 내가 차례로 뒤를 따른다. 암반 위에 군데 군데 눈이 쌓여 있는 믹스지대를 등반하는 재미가 좋다. 눈이 녹을 경우 난이도 높은 암벽이 되는 곳도 눈이 쌓이면 아이젠과 피켈을 이용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두 차례의 자일 하강 지점도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등반을 즐길 수 있는 아기자기한 코스가 이어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열려 눈맛이 시원해진다. 릿지 뒷편에선 몽블랑뒤따귈, 몽모디, 몽블랑 등의 고봉들이 등반하는 우리들을 지긋히 내려다보고 있다. 오른쪽 아랫편으로는 발레 블랑쉬 설원 위에 아득히 보이는 캠프 사이트들이 마치 개미집 같다. 왼쪽 절벽 아래로는 보쏭빙하와 샤모니 시가지가 손에 잡힐듯 가깝다.
특별한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구간들을 안전하게 통과하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으니 등반이 한층 더 즐겁다. 허선생은 안정감 있는 리딩과 함께 멋진 그림을 카메라에 담는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에귀디미디 전망대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순간 마지막 구간이 나타난다. 먼저 올라가신 허선생과 성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내가 라스트로 능선 상에 올라선다. 두 분은 이미 전망대 위에 올라가 계신다. 잠시 이어진 평탄한 설릉 위를 걸어간 후 철사다리를 타고 올라 전망대에 도착한다.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안전하게 등반을 마친 것에 대해 서로 서로 덕담을 나눈다. 전망대 내의 휴게소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씩으로 우리의 등반을 자축한다. 그리고 관광객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데크로 올라가 그늘에 누워 잠깐 동안 달콤한 낮잠에 빠진다. 등반의 피곤함을 어느 정도 달랜 후 아침 일찍 설릉을 향해 나섰던 얼음동굴에서 다시 설원을 향해 내려간다. 이제는 무거운 배낭이 없으니 한결 가벼운 마음이다. 텐트로 돌아와 다음 날의 몽블랑뒤따귈 등반을 위해 스마트폰에 담겨진 가요를 들으며 휴식을 취한다.
한밤중에 잠이 깨어 텐트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본다. 맑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 하나 하나가 왕방울처럼 크게 보인다. 이제까지 보아온 별들의 크기 중에서 으뜸이다. 하늘이 가까운 탓일 거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는다. 다시 침낭 속으로 몸을 집어 넣고 잠을 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상 시간이다.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헤드랜턴 불빛과 함께 몽블랑뒤따귈(Mont Blanc du Tacul)을 향해 출발한다. 고도 4248 미터의 몽블랑뒤따귈은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의 꼬리라는 뜻이라 한다.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 때에 에귀디미디가 내려다보이는 고도 4000 미터 정도에 올라섰으나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하고 돌아선다. 나와 성선생님 모두 전날의 코스믹 릿지 등반의 피로가 남아 있는 탓인지 가벼운 고소증세를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정상 정복에 대한 의지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미련없이 돌아설 수 있다. 설원에 내려선 후로는 이태리 방향으로 발레 블랑쉬 설원을 가로질러 가서 투르롱드와 그랑카푸친 등을 구경하고 텐트로 돌아온다.
캠프 사이트를 정리하여 배낭을 짊어지고 에귀디미디 전망대로 올라가는 일도 쉽지 않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가파른 설릉 위를 올라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힘을 쓰면 안락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을 다잡으니 어느새 얼음동굴 안이다. 먼저 도착하신 허선생님과 성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로 붐빌 것을 대비하여 지체하지 않고 케이블카에 오른다. 샤모니 시내에 내려와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니 더이상 좋을 수가 없다. 고지대의 설원에서 일박이일을 보냈을 뿐인데도 야생에서 오랫 동안 생활하다 돌아온 것 같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반갑게 느껴진다.
1. 에귀디미디 전망대에서 아찔한 설릉 위를 걸어서 내려간다.
2. 두 명의 산악인들이 에귀디플랑 방향의 설릉을 내려가고 있다.
3. 그림 같은 알프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우측 위로 그랑드조라스와 당뒤제앙을 잇는 능선이 보인다.
4. 갈림길에 배낭을 벗어 놓고 좋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에귀디플랑 방향의 능선을 걷는다.
5. 발레 블랑쉬 설원 위에 텐트를 친 후 코스믹 릿지 등반에 나선다.
6. 코스믹 동계 산장이 있는 고갯마루로 올라서고 있다.
7. 설벽을 오를 땐 피켈이 유용하다.
8. 우리가 등반하는 뒤로 보쏭빙하가 펼쳐져 있다.
9. 허선생이 선등이고 성선생님이 쎄컨, 내가 라스트를 맡는다.
10. 바위 틈에 캠을 설치하여 중간 확보점을 만든다.
11. 바위를 타고 넘는 구간에선 아이젠을 의식하고 등반해야 한다.
12. 진행 방향의 좌측 아래로는 샤모니 시가지가 펼쳐진다.
13. 발레 블랑쉬 설원 위의 캠프지가 개미집처럼 보인다.
14. 코스믹 릿지엔 두 번의 자일 하강 구간이 있다.
15. 바위턱을 넘어서야 하는 구간에선 피켈을 하네스에 걸쳐 놓아야 한다.
16. 우리 팀 앞뒤로 등반하는 이들이 많은 걸 보면 코스믹 릿지는 인기 있는 코스인 모양이다.
17. 설벽에서는 앞서간 이들의 스텝을 따르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다.
18. 내가 설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모습을 허선생님이 멀리서 잡았다.
19. 왼쪽에 우뚝 솟은 바위엔 알파인 지대 최고 수준 난이도의 암벽길이 개척되어 있다고 한다.
20. 우리 뒤를 따라온 현지 산악인들이 보인다.
21. 성선생님의 확보 하에 바위턱을 올라서고 있다.
22. 양지 바른 테라스에서 따뜻한 햇살 받으며 간식을 먹었다.
23. 성선생님이 피켈을 이용해 등반하고 계신다.
24. 라스트로 올라가는 내 모습을 몽블랑이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25. 이 곳을 올라서면 갑자기 마지막 구간이 나타난다.
26. 전망대에서 관광객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구간을 걷는다.
27. 등반을 마치고 다시 설원 위의 텐트로 향한다.
28. 캠프 사이트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29. 우리가 등반한 코스믹 릿지에 구름이 차오르고 있다.
30. 다음 날 새벽에 몽블랑뒤따귈 등반에 나선다.
31.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 가운데 에귀디미디가 우뚝하다.
32. 등반 도중 일출이 시작된다.
33. 중간 휴식 지점에서 일출을 구경한다.
34. 정상을 향해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다.
35. 저 멀리 구름 바다가 일렁인다.
36. 이쯤에서 돌아서기로 결정한다.
37. 정상 정복에 대한 미련이 없기 때문인지 내려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38. 샤모니 계곡 너머 우쉬 언덕과 피츠 장벽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다.
39. 설원을 가로지르는 동안에도 크레바스를 의식하여 안자일렌을 하고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40. 일박이일의 등반을 마치고 에귀디미디 전망대로 귀환하는 중이다.
'암빙벽등반 > 해외등반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레블랑쉬 일대의 알파인 등반가들 (0) | 2016.08.17 |
---|---|
나의 첫 알파인 등반기 - 월간 <마운틴> 2013년 9월호 (0) | 2013.08.30 |
에귀 뒤 투르(3542 m) 등반 - 2013년 7월 1일~2일 (0) | 2013.07.17 |
가이앙 암장에서 등반을 즐기다 - 2013년 6월 17일 (0) | 2013.07.16 |
가이앙 암장에서의 등반 모습 (0) | 2013.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