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모니에 들어온지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그랑발콩노르, 프티발콩슈드, 프티발콩노르 등의 트레킹 루트들 걸었다. 짧게는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열 시간에 이르는 거리를 걸으며 몽블랑 산군의 아름다움에 서서히 젖어들었다. 성항경 님이 이틀 전에 합류하여 허긍열 선생의 안내에 따라 셋이서 발므 고개 트레킹을 다녀온 건 하루 전이다. 스위스와 프랑스가 국경을 이루는 발므 산장에 오른 후 투르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투르 빙하 위에 구름 사이로 솟구쳐 있는 에귀뒤투르(Aiguille du Tour)를 가리키며 허선생은 내일 우리가 등반할 봉우리라고 알려주셨다. 그 순간 트레킹 코스를 걷는 것으로 현지 적응을 위한 컨디션 조절을 했다고는 하지만 고산에서 처음으로 행할 알파인 등반이기에 기대감과 함께 나도 모르게 미묘한 긴장감이 찾아든다.
에귀뒤투르 등반에 나서기로 한 날의 오전 시간은 짐 꾸리는 데 보낸다. 알파인 등반 경험이 없는 성선생님과 나는 알파인 지대에서 필요한 식량과 의류, 장비 등에 대해 허선생께 이것 저것을 물으며 배낭을 채운다. 샤모니의 숙소에서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샤모니슈드 버스 정류장에서 투르마을(Le Tour)행 1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하차한다. 하루 전 걸어서 올랐던 발므고개로 향하는 케이블카에 올라타고 중간에 한 번 갈아탄 후 발므고개와 거의 같은 고도에 있는 종착지에 도착한다. 고도가 2251 미터라는 표시를 돌로 새겨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발므고개로 향하는 넓은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우리가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등반에 대해 거의 다른 말을 하지 않던 허선생이 버스를 기다리면서 간단히 당부한 말씀을 상기한다. 알파인 지대에서는 가능하면 코로만 호흡하라는 것이다. 코로만 숨쉬는 것이 힘들 경우엔 들숨은 코로 날숨은 입으로 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다. 실제로 알파인 지대에서 등반하는 동안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호흡법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코로 숨쉬는 것이 산소를 더 많이 섭취한다는 이론은 실감하기 힘들지라도 입 안이 건조해지지 않는다거나 좀 더 데워진 공기가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확연히 인지할 수 있었다.
투르빙하 바로 옆에 위치한 알베르 프리미에르 산장까지는 두어 시간이 소요된다. 설원에서 일박을 해야하는 캠핑 장비까지 들어있는 배낭을 메고 빙하 옆으로 형성된 설사면을 따라 오르는 것이 쉽지 않다. 한낮의 햇살을 받아 질척이기 시작한 눈길도 걸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투르빙하의 세락 지대를 바로 우측에 두고 가파른 눈길을 올라서면 알베르 프리미에르 산장이다. 산장을 지나쳐 백여 미터를 더 오른다.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어 텐트를 설치하기 좋은 장소가 나온다. 이 곳의 고도는 약 2700 미터 정도이다. 조금은 힘겨운 어프로치를 끝낸 후 빙하와 산장을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위치에 우리의 보금자리를 설치한다. 커피를 끓여 치즈와 함께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알파인 지대 한가운데에 텐트를 치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다. 고소 증세를 서서히 느낄 수 있는 지대이기 때문에 등반에 대비한 휴식을 취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이 곳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다. 텐트 안에 셋이서 드러누워 스마트폰에 담아온 가요를 듣는다. 조금은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 즐겁게 흘러간다.
허선생이 눈 녹인 물을 끓여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고지대에서 쉽게 퍼지는 쿠스쿠스라는 것이 저녁 메뉴다. 등반을 위해선 탄수화물 섭취가 필수적인데 쌀로 밥을 할 경우 고지대에서는 잘 익지 않기 때문에 끓는 물만 부으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쿠스쿠스를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어릴 때 먹었던 좁쌀밥과 유사한 쿠스쿠스에 치즈를 곁들여 먹으니 그런대로 구수하고 먹을만 하다. 성선생님은 치즈가 입맛에 맞지 않는 탓인지 많이 드시지 못한다. 한국에서 가져간 건조 북어국에 끓는 물을 부어 후식처럼 마시니 느끼한 맛이 어느 정도 가시는 듯하다. 맛깔스럽지는 않더라도 등반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 생각하고 의무적으로 먹어야 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휴식을 취한다. 산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석양을 구경하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온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부터 갑자기 한겨울처럼 냉기가 흐른다. 다운자켓을 걸쳐입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지는 해를 감상하는 기분이 편안하다. 산에서의 석양은 일출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듯하다.
새벽 세 시 반에 기상하여 빵과 스프를 먹고 장비를 착용한다. 하의는 고소내의와 오버트라우저를 입고 상체는 한국에서 겨울 산행을 나서는 복장에 고어자켓을 걸친다. 안전벨트와 크램폰을 착용하고 한 손엔 스틱 하나를 다른 손엔 피켈 하나를 잡는다. 배낭엔 물과 행동식만을 챙겨서 가볍게 출발한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눈 위에 난 등로를 따라 걷는다. 눈 위에 점점히 이어져 별빛처럼 빛나는 랜턴 불빛들이 우리 외에도 몇몇 팀들이 이른 시각에 등반에 나서고 있음을 알려준다. 뚜르봉을 왼쪽에 두고 눈길 완사면을 돌고 돌아 오르는 길이 힘겹다.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설사면의 기울기도 서서히 올라간다. 에귀뒤샤르도네 방향으로 가는 길이 있는 삼거리에서 쉬는 동안 배낭을 깔고 앉아 간식을 먹는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안자일렌 하고 우리 곁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갈림길에서 가파른 눈길을 올라서면 암릉 사이의 고개가 나온다. 고개를 넘어서니 구름 속이다. 잠시 쉬었다가 길을 재촉한다. 투르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을 왼쪽에 두고 완만한 눈길을 걸어 오른다. 경사진 눈길에서는 길이가 다른 스틱과 피켈을 사용하는 것이 생각보다 편하다. 높은 쪽에는 피켈을 꽂고 낮은 쪽에는 스틱을 짚으며 걸어가면 자연스럽게 균형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가파른 설사면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안자일렌을 한다. 허선생이 앞장서고 성선생님과 내가 순서대로 뒤를 따라 오른다. 스틱은 내려올 때 다시 가져갈 요량으로 눈 위에 꽂아 놓는다. 먼저 올라간 다른 팀들의 스틱도 여기 저기에 꽂혀있다. 설벽을 어느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이어진 바위 능선이 시작된다. 곳곳에 눈이 남아 있는 믹스 지대이다. 크램폰을 착용한 채 바위를 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피켈을 바위턱에 걸쳐서 확실한 홀드를 확보하며 등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심 조심 릿지길을 따라 오르다보니 어느새 정상이다. 주위는 구름 속에 가려서 시야가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알파인 등반으로 처음 산봉우리 정상에 올랐다는 만족감이 찾아든다. 우리 뒤로 육십대 중반의 현지 산악인 네 명이 좀 더 어려운 루트로 올라온다. 양손에 아이스 바일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파른 설벽이 있는 코스를 등반한 모양이다. 성선생님이 그들과 얘기 하면서 동년배임을 확인하신다. 모두들 대단한 등반 열정과 체력의 소유자들이란 생각이다.
하산할 때는 올라올 때의 역순으로 안자일렌을 한다. 내가 앞장서고 성선생님과 허선생이 뒤에서 앞 사람의 확보를 봐주는 시스템이다. 우리가 내려오는 길에 정상을 향해 오르는 여러 팀들을 만난다. 투르봉이 이 곳에서는 꽤 인기 있는 알파인 등반 대상지인 것 같다. 스틱을 꽂아두었던 위치로 돌아와 안자일렌을 해제하고 간식을 먹는다. 그동안 구름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여 눈앞에 장관이 펼쳐진다. 트리앙 빙하의 드넓은 설원과 스위스 알프스의 영봉들이 즐비하다. 저 멀리 마터호른의 뾰쪽한 정상부도 아스라히 보인다. 정상에 다녀온 후의 편안함 속에서 반겨주는 알프스의 미봉들이 하나 같이 예쁘기만 하다.
투르봉을 내려와 텐트로 돌아가는 길에 빙하 트레킹이나 암빙벽 등반을 즐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알파인 등반가들의 선구자적인 활동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누리고 있는 알파인 등반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들의 탐험적이고 도전적인 요소가 많았던 창조적인 등반 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 세대의 활동 영역은 넓어졌다. 창조적인 행위는 인간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이러한 창조적 행위의 수혜자들이다. 나와 같은 초보 등반가들이 위험 요소가 많은 고산에서 안전하게 알파인 등반을 즐길 수 있게 된 환경이 갖춰지기까지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산에 오르면서 한번쯤은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의 행위에 경의를 표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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