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해외등반여행

나의 첫 알파인 등반기 - 월간 <마운틴> 2013년 9월호

빌레이 2013. 8. 30. 15:35

월간 마운틴 9월호에 내가 투고한 등반기가 독자산행기란에 실렸다. 반가운 마음에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사들고 펼쳐본 순간 실망감이 밀려온다. 본래 출판사에 보냈던 원고에서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글이 돼버렸다. 책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편집상의 제한 사항들이 많을 것이다. 원고의 분량을 줄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문맥이 통하지 않는 수정은 원저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졸필의 글이나마 오탈자도 없고 어느 정도 맥락이 이어지는 편집을 기대했건만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독자산행기라서 가볍게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잡지에서 원하는 분량만을 추려내어 편집한 모양이다. 최종 인쇄물이 나오기 직전까지 저자와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오가는 학술논문을 주로 편찬해본 내게는 매우 낯선 일이다. 아는 사람들에게 읽어볼 것을 권해주기가 부끄럽다. 아래에 책에 실린 글과 처음에 출판사로 보낸 원고를 첨부한다.

 

 

 

 

 

아래는 내가 출판사로 보낸 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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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알파인 등반   글 강주성 / 사진 허긍열

 

내가 암벽등반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오래 전 일이다. 산악서적을 읽으면서 잘 이해되지 않는 등반용어들을 알고 싶은 이유도 있었고 암릉 등반을 좀 더 안전하게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빠져들기 쉽지 않은 시간적 심리적 요인들 또한 많았다. 이렇게 망설이던 내 마음을 한 곳으로 정하게 만든 계기가 바로 몽블랑 자락 샤모니에 위치한 가이앙 암장이다. 3년 전 혼자서 8박9일 일정으로 샤모니와 쩨르마트 인근의 알프스 트레킹에 나섰던 때였다. 흐린 날씨에 벨라샤 산장에서 브레방 전망대로 오르려 했었다. 하지만 6월 초라서 곳곳에 눈이 남아 있어 중간에 돌아서야만 했다. 하산길을 가이앙 암장 쪽으로 잡았다. 암장의 드넓은 잔디밭에 앉아 암벽에 붙어서 등반을 즐기고 있는 이들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 어린이들부터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들까지 연령층도 다양했다. 암장 주위의 풍광도 빼어나고 도로변에 있어서 접근도 용이했다. 벽이 넓어서 난이도도 다양하고 혼잡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환경에서라면 암벽등반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 후로 한국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등산학교 암벽반과 빙벽반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암빙벽 등반을 즐기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여가 흐른 후에 다시 샤모니에 오게 되어 가이앙 암장에 붙고 싶은 마음에 허긍열 선생에게 부탁하여 오르게 되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우리는 서너 코스를 오르는 즐거움을 가졌다. 3년 전에는 구경꾼이 되어 막연히 하고 싶다는 마음만 품었을 뿐이다. 그 마음이 현실이 되어 암벽을 즐겼다는 사실이 신기하고도 뿌듯했다. 이렇게 알피니즘의 고향에서 등반의 즐거움이 가슴 가득 차게 되자 나는 눈 덮인 알파인 지대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샤모니에 온지 일주일이 훌쩍 지났을 때다. 그동안 그랑발콩노르, 프티발콩슈드, 프티발콩노르 등의 트레킹 루트들을 걸었다. 짧게는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열 시간에 이르는 거리를 걸으며 몽블랑 산군의 아름다움에 서서히 젖어들었다. 마침 성항경 님이 합류하여 허선생과 함께 셋이서 발므 고개 트레킹을 다녀온 건 하루 전이었다. 스위스와 프랑스가 국경을 이루는 발므 산장에 오른 후 투르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투르 빙하 위에 구름 사이로 솟구쳐 있는 에귀 뒤 투르(Aiguille du Tour)가 손짓하고 있었다. 다음날 우리가 등반할 봉우리였다. 그 순간 트레킹 코스를 걷는 것으로 현지 적응을 위한 컨디션 조절을 했다고는 하지만 고산에서 처음으로 행할 알파인 등반이기에 기대감과 함께 나도 모르게 묘한 긴장감이 찾아든다.

 

에귀 뒤 투르 등반에 나서기로 한 날 오전은 짐 꾸리는 데 보낸다. 알파인 등반 경험이 없는 성선생님과 나는 알파인 지대에서 필요한 식량과 의류, 장비 등에 대해 허선생에게 이것저것을 물으며 배낭을 채운다. 숙소에서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샤모니슈드 버스 정류장에서 투르마을(Le Tour)행 1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하차한다. 하루 전 걸어서 올랐던 발므 고개로 향하는 케이블카에 올라타고 중간에 한 번 갈아탄 후 발므 고개와 거의 같은 고도에 있는 종착지에 도착한다. 고도가 2251 미터라는 표시를 돌로 새겨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발므고개로 향하는 넓은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우리가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등반에 대해 거의 다른 말을 하지 않던 허선생이 버스를 기다리면서 간단히 당부한 말씀을 상기한다. 알파인 지대에서는 가능하면 코로만 호흡하라는 것이다. 코로만 숨쉬는 것이 힘들 경우엔 들숨은 코로 날숨은 입으로 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다. 실제로 알파인 지대에서 등반하는 동안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호흡법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코로 숨쉬는 것이 산소를 더 많이 섭취한다는 이론은 실감하기 힘들지라도 입 안이 건조해지지 않는다거나 좀 더 데워진 공기가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확연히 인지할 수 있었다

 

투르빙하 바로 옆에 위치한 알베르 프리미에르 산장까지는 두어 시간이 소요된다. 설원에서 1박을 해야 하는 캠핑 장비까지 들어있는 배낭을 메고 빙하 옆으로 형성된 설사면을 따라 힘겹게 오른다. 한낮의 햇살을 받아 질척이기 시작한 눈길도 걸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투르빙하의 세락 지대를 바로 우측에 두고 가파른 눈길을 올라서면 알베르 프리미에르 산장이다. 산장을 지나쳐 백여 미터를 더 오른다. 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어 텐트를 설치하기 좋은 장소가 나온다. 이곳의 고도는 약 2700미터 정도이다. 조금은 힘겨운 어프로치를 끝낸 후 빙하와 산장을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위치에 우리의 보금자리를 설치한다. 커피를 끓여 치즈와 함께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알파인 지대 한가운데에 텐트를 치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다. 고소증세를 서서히 느낄 수 있는 지대이기 때문에 등반에 대비한 휴식을 취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이 곳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다. 텐트 안에 셋이서 드러누워 스마트폰에 담아온 가요를 듣는다. 조금은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 즐겁게 흘러간다.

 

허선생이 눈 녹인 물을 끓여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고지대에서 쉽게 퍼지는 쿠스쿠스라는 것이 저녁 메뉴다. 등반을 위해선 탄수화물 섭취가 필수적인데 쌀로 밥을 할 경우 고지대에서는 잘 익지 않기 때문에 끓는 물만 부으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쿠스쿠스를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어릴 때 먹었던 좁쌀밥과 유사한 쿠스쿠스에 치즈를 곁들여 먹으니 그런대로 구수하고 먹을 만하다. 성선생님은 치즈가 입맛에 맞지 않는지 많이 드시지 못한다. 한국에서 가져간 건조 북어국에 끓는 물을 부어 후식처럼 마시니 느끼한 맛이 어느 정도 가시는 듯하다. 맛깔스럽지는 않더라도 등반을 위한 준비 과정이라 생각하고 의무적으로 먹어야 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휴식을 취한다. 산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석양을 구경하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온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부터 갑자기 한겨울처럼 냉기가 흐른다. 다운자켓을 입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지는 해를 감상하는 기분이 편안하다. 알파인 지대에서의 석양은 일출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는듯하다.

 

새벽 3시 반에 기상하여 빵과 스프를 먹고 장비를 착용한다. 하의는 고소내의와 오버트라우저를 입고 상체는 한국에서 겨울산행을 나서는 복장에 고어자켓을 걸친다. 안전벨트와 크램폰을 착용하고 한 손엔 스틱 하나를 다른 손엔 피켈 하나를 잡는다. 배낭엔 물과 행동식만 챙겨서 가볍게 출발한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눈 위에 난 등로를 따라 걷는다. 눈 위에 점점이 이어져 별빛처럼 빛나는 랜턴 불빛들이 우리 외에도 몇몇 팀들이 이른 시각에 등반에 나서고 있음을 알려준다. 투르봉을 왼쪽에 두고 눈길 완사면을 돌고 돌아 오르는 길이 힘겹다.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설사면의 기울기도 서서히 올라간다. 에귀 뒤 샤르도네 방향으로 가는 길이 있는 삼거리에서 쉬는 동안 배낭을 깔고 앉아 간식을 먹는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안자일렌을 하고 우리 곁을 지나는 모습이 보기 좋다. 갈림길에서 가파른 눈길을 올라서면 암릉 사이의 고개가 나온다. 고개를 넘어서니 구름 속이다. 잠시 쉬었다가 길을 재촉한다. 투르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을 왼쪽에 두고 완만한 눈길을 걸어 오른다. 경사진 눈길에서는 길이가 다른 스틱과 피켈을 사용하는 것이 생각보다 편하다. 높은 쪽에는 피켈을 꽂고 낮은 쪽에는 스틱을 짚으며 걸어가면 자연스럽게 균형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향하는 가파른 설사면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안자일렌을 한다. 허선생이 앞장서고 성선생님과 내가 순서대로 뒤를 따라 오른다. 스틱은 내려올 때 다시 가져갈 요량으로 눈 위에 꽂아 놓는다. 먼저 올라간 다른 팀들의 스틱도 여기저기에 꽂혀있다. 설벽을 어느 정도 오르면 정상으로 이어진 바위능선이 시작된다. 곳곳에 눈이 남아 있는 믹스 지대이다. 크램폰을 착용한 채 바위를 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피켈을 바위턱에 걸쳐서 확실한 홀드를 확보하며 등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심조심 암릉을 따라 오르다보니 어느새 정상이다. 주위는 구름 속에 가려서 시야가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지만 알파인 등반으로 처음 산봉우리 정상에 올랐다는 만족감이 찾아든다. 우리 뒤로 60대 중반의 현지 산악인 4명이 좀 더 어려운 루트로 올라온다. 양손에 아이스 바일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파른 설벽이 있는 코스를 등반한 모양이다. 성선생님이 그들과 얘기하면서 동년배임을 확인한다. 모두들 대단한 등반 열정과 체력의 소유자들이란 생각이 든다.

 

하산할 때는 올라올 때의 역순으로 안자일렌을 한다. 내가 앞장서고 성선생님과 허선생이 뒤에서 앞 사람의 확보를 봐주는 시스템이다. 우리가 내려오는 길에 정상을 향해 오르는 여러 팀들을 만난다. 투르봉이 이 지역에서는 꽤 인기 있는 알파인 등반 대상지인 것 같다. 스틱을 꽂아두었던 위치로 돌아와 안자일렌을 해제하고 간식을 먹는다. 그동안 구름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여 눈앞에 장관이 펼쳐진다. 트리앙 빙하의 드넓은 설원과 스위스 알프스의 영봉들이 즐비하다. 저 멀리 마터호른의 뾰쪽한 정상부도 아스라이 보인다. 정상에 다녀온 후의 편안함 속에서 반겨주는 알프스의 미봉들이 하나 같이 예쁘기만 하다.

 

투르봉을 내려와 텐트로 돌아오는 길에 빙하 트레킹이나 암빙벽 등반을 즐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알파인 등반가들의 선구자적인 활동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누리고 있는 알파인 등반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의 탐험적이고 도전적인 요소가 많았던 창조적인 등반행위 때문에 우리 세대의 활동영역은 넓어졌다. 창조적인 행위는 인간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이며 우리 모두는 이러한 창조적 행위의 수혜자들이다. 나와 같은 초보 등반가들이 위험요소가 많은 고산에서 안전하게 알파인 등반을 즐길 수 있게 된 환경이 갖춰지기까지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산에 오르면서 한번쯤은 그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들의 행위에 경의를 표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투르봉을 등정한 것으로 알파인 등반을 처음 경험한 후 산에 오르지 않고 이틀간의 휴식시간을 보낸다. 다음 날 가벼운 마음으로 브레방 전망대에서 우쉬언덕을 다녀온다. 트레킹 코스를 걷는 내내 몽블랑에서 에귀디미디로 이어지는 설산들이 하늘금을 이루고 있는 절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눈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는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이 가까운 곳에서도 알파인 등반을 즐길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에귀디미디에 올라가 발레 블랑쉬 설원에서 야영하고 코스믹 리지와 몽블랑 뒤 따귈을 등반하기로 계획한 것을 상기하면서 마음이 설레인다. 

 

고도 3840미터의 에귀 디 미디 전망대에서 설릉으로 나서는 얼음 동굴 앞이다. 등반장비를 착용하는 산악인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며칠 전에 함께 한 두 분 옆에서 나도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아이젠을 빙벽화에 단단히 고정시킨다. 케이블카를 타고 여행자 차림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신기한듯 우리를 쳐다본다. 관광객들 속에서 3년 전 알프스 트레킹을 위해 샤모니에 왔을 때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카메라를 둘러메고 혼자 트레킹 하던 그때는 보기 드문 광경이라면 어느 것이든 사진으로 남기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아슬아슬한 설릉 위를 걸어서 내려가는 사람들이 이채롭게 보였었고 여지없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었다. 그 당시 카메라의 뷰파인더 속에 있던 등반가들 중 한 명처럼 내가 직접 설릉 위를 걸어간다고 생각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내가 찍어두었던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신비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세 사람이 안자일렌을 하고 설릉 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몽블랑 산군의 하얀 설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대자연의 품에 안기는 순간이다. 전망대의 인공 구조물 속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우주로 공간이동 하는 느낌이다. 불과 몇 발짝 옮겼을 뿐인데도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양쪽 사면은 깎아지른 설벽이고 날등 위로는 먼저 내려간 사람들에 의해 다져진 눈길이 오솔길처럼 좁다랗게 형성되어 있다. 설릉 위를 내려가는 동안 내가 맨 앞이고 중간이 성선생님이다. 허선생은 맨 뒤에서 자일로 연결된 우리 두 사람이 내려서는 것을 확보하면서 사진 촬영까지 한다. 내리막 설릉의 기울기가 높은 곳은 계단처럼 눈이 깎여져 있어 발걸음 옮기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 긴장감 속에 경사진 설릉을 한 발 한 발 내려오니 어느새 완만한 설원이다. 아이젠을 딛고 걷는 발걸음도 서서히 익숙해진다. 비로소 몽블랑 산군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좀 더 좋은 풍광을 보여주기 위해 허선생은 야영지인 발레 블랑쉬 설원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배낭을 내려놓게 한다. 가벼워진 몸으로 에귀 뒤 플랑 방향으로 이어진 능선 위를 걷는다. 현지 산악인 두 명이 우리 앞을 내려가고 있다. 그들의 우측 너머로 그랑드 조라스에서 당 뒤 제앙까지 이어진 산줄기가 손에 잡힐듯 가깝게 보인다. 몽블랑 산군의 침봉들이 그림처럼 펼쳐진 경치는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힘들다. 더 이상 내려가기 위험한 능선 위에 멈춰 서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돌아선다. 배낭을 벗어둔 갈림길에서 짐을 챙겨 발레 블랑쉬로 향한다. 드넓은 호수가 얼어붙은 후에 하얀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발레 블랑쉬 설원은 평화롭고 광활하다. 코스믹 리지에서 가까운 곳에 야영할 장소를 찾아든다. 누군가 텐트를 친 흔적이 뚜렷하여 파헤친 눈으로 자연스레 바람막이 담장이 설치된 곳이다. 이런 곳이 없을 경우엔 눈삽을 이용해 한참 동안 캠핑사이트를 만들어야 했을텐데 운이 좋은 편이다. 바닥만 간단히 골라서 평평하게 다진 후 손쉽게 텐트를 설치하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신다.

 

예상보다 일찍 캠프를 차린 탓에 점심 먹고 출발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짧은 휴식 후 곧바로 코스믹 리지 등반에 나선다. 허선생의 배낭에 간식과 물을 챙기고 성선생님과 나는 피켈 하나만 손에 쥔채 출발한다. 코스믹 동계산장이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된다. 허선생의 리딩 하에 성선생님과 내가 차례로 뒤를 따른다. 암반 위에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는 믹스지대를 등반하는 재미가 좋다. 눈이 녹을 경우 난이도 높은 암벽이 되는 곳도 눈이 쌓이면 아이젠과 피켈을 이용해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두 차례의 자일 하강지점도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등반을 즐길 수 있는 아기자기한 코스가 이어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열려 눈이 시원해진다. 리지 뒤편에선 몽블랑 뒤 따귈, 몽모디, 몽블랑 등의 고봉들이 등반하는 우리들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오른쪽 아래로는 발레 블랑쉬 설원 위에 아득히 보이는 캠프 사이트들이 마치 개미집 같다. 왼쪽 절벽 아래로는 보송 빙하와 샤모니 시가지가 손에 잡힐듯 가깝다.

 

특별한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구간들을 안전하게 통과하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으니 등반이 한층 더 즐겁다. 허선생은 안정감 있는 리딩과 함께 멋진 그림을 카메라에 담는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에귀 디 미디 전망대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어느 순간 마지막 구간이 나타난다. 먼저 올라간 두 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능선에 올라선다. 두 분은 이미 전망대 위에 올라가 있다. 잠시 이어진 평탄한 설릉 위를 걸어간 후 철사다리를 타고 올라 전망대에 도착한다.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안전하게 등반을 마친 것에 대해 서로 덕담을 나눈다. 전망대 내의 휴게소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씩으로 우리의 등반을 자축한다. 그리고 관광객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옥상으로 올라가 그늘에 누워 잠깐 동안 달콤한 낮잠에 빠진다. 등반의 피곤함을 어느 정도 달랜 후 아침 일찍 설릉을 향해 나섰던 얼음동굴에서 다시 설원을 향해 내려간다. 이제는 무거운 배낭이 없으니 한결 가벼운 마음이다. 설원에 친 텐트로 돌아와 다음 날의 몽블랑 뒤 따귈 등반을 위해 스마트폰에 담겨진 가요를 들으며 휴식을 취한다.

 

한밤중에 잠이 깨어 텐트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본다. 맑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 하나하나가 왕방울처럼 크게 보인다. 이제까지 보아온 별들의 크기 중에서 으뜸이다. 하늘이 가까운 탓일 거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는다. 다시 침낭 속으로 몸을 집어넣고 잠을 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상 시간이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헤드랜턴 불빛과 함께 몽블랑 뒤 따귈을 향해 출발한다. 4248미터의 몽블랑 뒤 따귈은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의 꼬리라는 뜻이라 한다.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 때에 에귀 디 미디가 내려다보이는 고도 정도에 올라섰으나 돌아선다. 나와 성선생님 모두 전날의 코스믹 리지 등반의 피로가 남아 있는 탓인지 가벼운 고소증세를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정상 정복에 대한 의지가 없는 상태였기에 미련없이 돌아설 수 있었다. 설원에 내려선 후로는 이태리 방향으로 발레 블랑쉬 설원을 가로질러 투르 롱드와 그랑 카푸친 등을 구경하고 텐트로 돌아온다.

 

캠프 사이트를 정리하여 배낭을 짊어지고 에귀 디 미디 전망대로 오르는 일도 쉽지 않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가파른 설릉 위를 올라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힘을 쓰면 안락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을 다잡으니 어느새 얼음동굴이다. 먼저 도착한 두 분이 반갑게 맞아준다.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로 붐볐기에 지체하지 않고 케이블카에 오른다. 샤모니 시내에 내려와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고지대의 설원에서 1박2일을 보냈을 뿐인데도 야생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돌아온 것 같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반갑게 느껴진다.

 

전문산악인들의 등반에 비하면 이번에 경험한 나의 알파인 등반은 변변찮은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산서 속에서 접했던 위대한 등반가들의 흔적을 직접 보고 느낀 바는 적지 않다. 한 예로 드뤼가 정면으로 보이는 몽탕베르 돌탑언덕에서 발터 보나티의 남서 필라 단독초등을 설명한 안내판과 그 옆에 누군가 세워놓은 드뤼를 닮은 바위를 대면한 적이 있다. 그 순간 알프스에 가기 직전에 읽었던 보나티의 책 속에 숨어 있던 등반구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이와 같이 알피니즘의 향기를 조금이나마 맡아볼 수 있었음은 커다란 행운이고 무한한 기쁨이었다. 알피니즘의 고향 샤모니에서 2주 동안 지내면서 경험한 나의 첫 알파인 등반은 소중한 추억으로 각인되어 있으며 앞으로의 일상에 커다란 활력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벌써부터 알파인지대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