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등반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수봉 정상을 밟아보고 싶어한다. 암벽등반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유집사님과 박교수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두 분께서 인수봉 정상을 즐겁게 다녀올 수 있는 고독길 등반을 계획했었다. 지난 번 설악산 몽유도원도 릿지길 등반에서와 같이 네 사람이 자일파티를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박교수님께서 교육대학원 입시 때문에 토요일 오전엔 출근하셔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할 수 없이 박교수님을 제외한 세 명이 등반에 나서기로 한다.
새벽 다섯 시 정각에 유집사님 댁을 출발한 차가 중간에 나와 은경이를 차례로 픽업한 후 도선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왔던 때보다 차를 세워둘 장소가 여유있어서 좋다. 최근에 라오스 선교여행을 다녀오신 유집사님의 재미난 이야기를 들으며 어프로치를 시작한다. 인수봉 동벽 앞의 장비 착용 장소에 도착한 시각은 여섯 시 사십 분 경이다. 우리가 오늘의 첫 등반팀일줄 알았는데 이미 두 팀이 붙어있다. 우리들 머리 위의 취나드B길에 한 팀이 등반 중이고, 다른 한 팀은 남쪽 벽에 있는 루트를 오르고 있어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두 팀이 서로 아는 사이인지 두 팀 사이에 진한 경상도 사투리가 오간다.
등반 팀이 많지 않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천천히 장비를 착용하면서 그 여유로움을 즐긴다. 고독길 초입에 도착하여 등반을 시작한 시각은 일곱 시 이십 분 경이다. 고독길은 많이 가본 루트지만 선등은 처음이다. 무엇보다 안전에 유의하면서 크랙에 두 개의 캠을 박고 첫째 마디를 천천히 오른다. 두 번째로 오르는 유집사님을 위해 가능한한 후등자가 보이는 곳에서 피치를 끊는다. 부담스런 첫 마디를 안전하게 마감하니 등반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는 듯하다.
손과 발 홀드 양호한 둘째 마디 말미의 짧은 오버행 밑에서 바위 구멍에 슬링을 걸고 퀵드로를 통과시켜 선등자 확보점을 만든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턱진 바위 밑에 캠을 설치하고 자일을 통과시킨 후 턱을 넘어서니 자일이 바위턱에 쓸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다행히 등반 난이도가 높지 않은 구간이라 자일이 손상될 염려는 없었으나 앞으로 선등할 때는 자일 유통도 좀 더 세밀히 생각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셋째 마디는 동굴을 통과하여 걸어가는 구간이다. 시원한 동굴 안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피해 잠시 쉬어간다.
넷째 마디는 비교적 쉬운 구간이고, 다섯째 마디는 세로로 길게 뻗은 크랙 등반 구간이다. 크랙에 발 재밍을 확실히 하고 오르니 안정적이다. 우리 팀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고독길 등반이지만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다. 정체 현상 없이 조용히 등반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좋다. 여섯째 마디는 귀바위 밑을 오르는 사십 미터 길이의 경사도 높은 구간이다. 홀드는 비교적 양호하다. 그래도 안전을 위하여 아래에서 빌레이 보는 은경이의 조언에 따라 적절한 위치에 두 개의 캠을 설치하고 오르니 안정적이다. 피치 말미엔 정상으로 향하는 통천문 같은 바위틈이 있어 인상적이다.
일곱째 마디는 길지 않은 침니 구간이다. 우측 벽의 크랙을 따라 오른 후 중간에서 좌측 벽에 왼발을 지탱하는 스태밍 자세로 오르니 안정적이다. 인수봉이 처음인 유집사님도 유연하게 통과하신다. 이 구간을 넘어서면 인수A길과 만난다. 일명 영자크랙 구간인 여덟째 마디는 일자로 뻗어내린 크랙 위의 덧장 바위 구간이 더 어렵다. 중간의 언더 크랙에 치수가 맞지 않은 캠을 설치하려다 회수하지 못할 뻔 했지만 다행히 몇 번의 노력 끝에 빼낼 수 있었다. 언더 크랙이 아닌 왼쪽의 세로 크랙에 다시 캠을 설치하고 오르니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어 무사히 통과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캠을 설치할 때마다 단 번에 적절한 호수를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눈대중 감각이 많이 무뎌진 탓이다.
인수봉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인 참기름 바위에서 유집사님이 선등으로 오르시도록 배려한다. 내가 인수봉에 처음 오를 때 이 마지막 구간에서 짧게나마 선등을 섰던 기억이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안전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판단 하에 처음으로 인수봉 정상을 밟아보는 유집사님께도 그 기분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다. 프랑스 샤모니에서 알프스의 등반 가이드들이 안전에 이상이 없는 한 정상 몇 미터 전에서는 앞서지 않고 손님이 먼저 정상을 밟도록 배려해주는 모습이 멋져 보였었다.
여유있고 즐거운 등반을 마치고 도착한 인수봉 정상엔 우리 세 명 외에는 아무도 없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맞은편 백운대 위의 수많은 일반등산객들을 구경하면서 인증사진도 남기고 간식도 나눠 먹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오전 열 시 경에 도착한 인수봉 정상에서 삼십 분 정도를 노닐다가 하강 길에 접어든다. 육십 미터 자일 한 동과 사십오 미터 자일 한 동을 사용하여 하강한다. 은경이와 유집사님은 한 줄로 육십 미터를 한 번에 하강하고 나는 자일 회수를 위해 중간 피톤에서 한 번 끊어서 두 번의 두 줄 하강을 한다. 유집사님의 첫 인수봉 정상 등정과 나의 인수봉 첫 선등은 이렇게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고 만족스럽게 마무리 된다.
하강을 마치고 걸어 내려오던 중 학교 일이 일찍 끝난 박교수님을 인수봉 동벽 아래에서 반갑게 만난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이제 네 사람이 자일파티를 이루어 인수A길을 등반하기 위해 오아시스로 향하는 대슬랩에 붙는다. 이번에는 역할을 바꿔 은경이가 선등을 맡고 내가 선등자 빌레이와 라스트를 맡는다. 오아시스까지 은경이, 박교수님, 유집사님, 나 순서로 슬랩 등반을 이어간다. 그늘이 없는 슬랩이라 그런지 예상보다 덥고 땀이 많이 난다. 유집사님의 암벽화가 아직 익숙치 않은 바람에 디딜 때마다 통증을 느끼시는 것 같다.
늦게 오신 박교수님께는 죄송한 마음이지만 오아시스에서 쉬다가 내려가는 것으로 결정한다. 한 번의 등반을 끝낸 세 사람도 체력이 많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박교수님도 정상은 언제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흔쾌히 동의해주시니 마음이 가볍다. 유집사님은 발의 통증을 참고 오르는 데까지 올라가자고 하시지만 안전을 위해서도 즐겁지 않은 등반을 계속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 이름만큼이나 시원한 오아시스에서 한참을 놀다가 하강하여 오늘 등반을 마친다. 내가 처음으로 인수봉 정상을 밟은 것이 팔일오 광복절이고, 선등으로 처음 오른 오늘이 남북의 육일오 공동선언 기념일이란 사실도 이채롭다. 여러모로 뜻 깊고 만족스런 등반을 즐긴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다.
1. 인수봉 등반이 처음인 유집사님께서 귀바위 밑 구간을 등반하고 있다.
2. 우리가 도착한 여섯 시 사십 분 경에 벌써 취나드B길에서 한 팀이 등반 중이다.
3. 고독길 첫째 마디. 좌측의 턱을 잡고 크랙 쪽으로 넘어선 후를 약간 조심해야 한다.
4. 고독길 두번째 마디. 상단의 턱진 바위에 캠을 설치할 경우 자일 유통에 주의해야 한다.
5. 셋째 마디는 동굴을 통과하여 걸어가는 구간이다.
6. 동굴 안쪽의 시원한 그늘에서 떠오르는 해를 피해 잠시 쉬어간다.
7. 유집사님은 아직까지 암벽화를 신으면 통증이 느껴진다고 하신다.
8. 귀바위 밑의 침니 구간이다. 우측 크랙을 따라 오르다 좌측 벽을 이용해 스태밍 자세로 오르면 안정적이다.
9. 영자 크랙 위의 반침니 구간에선 좌측 날등의 손 홀드를 이용하면 안정적이다.
10. 등반을 마치고 내려와 동벽 아래에서 박교수님을 만나 오아시스까지 오른다.
11. 은경이의 든든한 빌레이 덕택에 인수봉에서 아주 만족스런 첫 선등을 할 수 있었다.
12. 오후에 합류하신 박교수님은 인수봉 정상을 다음으로 미루고 오아시스까지의 슬랩등반으로 마무리 하는 데에 흔쾌히 동의해주신다.
13. 남북의 육일오 공동 선언 기념일에 유집사님은 처음으로 인수봉 정상을 밟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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