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우리 나라의 가을 날씨는 산행하기에 정말 좋다.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기온이 그러하다. 가을엔 창밖을 보고 있으면 자꾸 산으로 가고 싶어진다. 추석 연휴에 허긍열 선생님과 문자를 주고 받았다. 최근 샤모니에서 귀국한 듯했다. 연휴 직후 목요일 강의를 모두 마친 오후는 피곤이 몰려오는 시간이다. 고향 다녀온 후의 피로감과 강의 직후의 노곤함이 겹친 탓이다. 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럴 땐 항상 산이 먼저 떠오른다. 산 속에서 가을 밤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 찾아든다. 이미 내 맘 속은 팔공산에서의 일박을 꿈꾸고 있다.
즉흥적으로 결정한 산행이라 대구에 계신 허 선생님께 연락하기가 망설여진다. 팔공산에 가는데 연락 안 한다는 것도 좀 그렇다는 생각에 일단은 나의 계획을 알려드리기로 한다. 다른 일정이 계획돼 있다면 폐를 끼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런 마음이다. 목요일 저녁 때 허 선생님과 전화 통화가 닿았다. 우리는 금요일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동대구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대략 2년 전, 허 선생님과 팔공산에서 암벽도 하고 한 텐트 속에서 밤을 보냈던 때의 추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때는 오소리 한 마리가 나타나 잠을 방해하기도 했었다.
고속열차 KTX는 서울역을 출발한지 불과 두 시간만에 나를 동대구역으로 공간이동 시켜준다. 창밖으로 펼쳐진 황금빛 들판이 홀로 떠나는 나그네의 가을 여행을 축복해주는 듯하다. 하차하여 나가는 길목에서 허 선생님과 반가운 재회를 한다. 지난 5월, 허 선생님의 특강 때 서울에서 만난 이후로 처음이다. 그간 허 선생님은 프랑스 샤모니에 있는 집에 거주하시다가 얼마 전에 돌아온 것이다. 산악잡지나 고알프스 카페를 통해서 지난 여름 알프스에서 그의 등반 활동은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었다. 건강한 모습을 다시 대하니 무척 반가웠다.
우리는 동대구역 구내의 커피숍에서 간단히 그간의 회포를 풀고 대구에서의 산행 계획을 상의했다. 다행히 새로운 책 출판을 위해 인쇄소에 잠깐 들러야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일정이 없다고 하신다. 허 선생님은 이미 나와 함께 보낼 시간에 대해서 세심한 계획을 세워놓으신 것 같았다. 훌륭하고 믿음직한 가이드와 동행하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내가 시내의 영풍문고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허 선생님은 근처의 인쇄소에 다녀오셨다. 다시 만난 우리는 전철을 타고 대구 월드컵경기장 부근의 인공암벽장으로 이동했다.
얼마 후 대구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된다고 한다. 스포츠 클라이밍도 시범 종목으로 열린다고 한다. 그 경기장이 될 인공암벽장은 대회 준비로 분주한 듯하다. 암장 관리자가 허 선생님의 친구분이라고 하여 암장 사무실에 내 배낭을 맡겨 놓고 뒷산으로 트레킹을 다녀온다. 호젓한 오솔길이지만 오르막은 가파른 편이다. 해발 육백여 미터의 대덕산 정상부의 전망대에서는 월드컵경기장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정상에서 이어지는 능선길은 두 사람이 얘기 나누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등의 들꽃들이 만발해 있으니 더욱 즐겁다.
허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 주고 받으며 다섯 시간 정도를 산책하고 저수지를 거쳐 인공암장으로 돌아온다. 배낭을 찾아 둘러메고 허 선생님 부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시내로 향한다. 허 선생님의 아내인 장정미님 또한 약사가 직업이지만 최근 헤르만 불의 전기를 번역하실 정도로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이다. 장 약사님과도 구면이기에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팔공산으로 향한다. 가는 길 중간의 산 아래 식당에서 송이순두부찌개를 사주신다. 그 맛이 가히 일품이다. 자연산 송이의 향기가 그윽하게 배어있는 순두부찌개의 맛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탑골에 주차를 하고 셋이서 야간 산행에 나선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의 산행 끝에 염불암을 거쳐 무인산장에 도착한다. 대구등산학교에서 가끔 숙소로 사용한다는 산장은 오래 되었지만 관리인이 있는 산장처럼 정갈하다. 간단한 여장을 풀고 샤모니에서 따오셨다는 마가목으로 담근 술을 홀짝이면서 담소를 나누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산 속의 고요함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산장의 분위기는 허 선생님 부부의 인상 만큼이나 평온하다. 오소리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우수개 소리도 하면서 서로의 대화는 깊어간다.
아침에 일찍 기상하여 산장 주위를 요모조모 살펴본다. 머릿돌을 확인하니 1970년도에 지어진 건물이다. 자연석을 잘 짜맞춘 외벽은 건물의 품위를 높여준다.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이란 책에서 읽은 돌집의 한 전형을 보는 것 같은 기쁨이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처음엔 벽난로도 있었던 것 같다. 굴뚝은 남아 있어서 초록색 지붕과 함께 산장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다. 사십 년이 넘은 건물답게 주위의 아름드리 소나무들도 하나 같이 멋지다. 우리 나라에서 품위를 간직한 오래된 건축물을 보기가 참 힘든데, 팔공산 숲속에서 본 이 건물은 허름해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이 의연하다. 이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이 뿌듯하고 기뻤다.
북어포를 넣은 라면이 아침 메뉴라며 허 선생님이 끓여주신다. 두 분이 지난 여름 샤모니에서 체르마트를 횡단하는 트레킹 중간에 발견한 레시피라며, 우연히 라면에 북어포를 넣었더니 맛이 좋았다고 하신다. 과연 그 맛이 최고다. 라면 특유의 느끼함은 사라지고 개운해진 국물 맛이 끝내준다. 집에서는 종종 라면에 콩나물을 넣어 먹는데 북어포를 넣은 맛은 개운함이 더 좋은 것 같다. 만족스런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산장을 나선다. 염불암을 거쳐 걷기 좋은 오솔길로 하산하니 힘들지도 않고 한적해서 좋다. 중간에 커피를 나눠 마시며 얘기 나누는 재미가 쏠쏠하다. 허 선생님 뿐만 아니라 장 약사님과도 오랜 지기처럼 대화가 잘 통한다. 나도 참으로 오랜만에 여러 가지 얘기를 편하게 지껄인 것 같다.
하산을 마친 후 차에 배낭을 두고 다시 수태지계곡길을 올라가니 너럭바위가 나온다. 그 곳이 허 선생님 부부의 정원이라면서 편하게 앉아 간식을 나눠 주신다. 인적 드문 계곡의 너럭바위는 조그만 폭포수가 돌아나가는 멋진 곳이다. 선비들이 앉으면 시 한 수 절로 나올만한 명당이다. 계곡물에 반사된 빛이 일렁이며 낮은 절벽에서 반짝이는 모습도 정겹다. 나에게 좋은 곳을 안내해주고 싶은 허 선생님의 세심함과 따뜻한 마음이 읽혀지니 내 마음도 더욱 훈훈해지는 것 같았다. 계곡길 산책을 마치고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각종 나물과 된장찌개, 밑반찬이 모두 맛깔스럽다. 전라도가 고향인 내게는 경상도 음식에 대한 편견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버려야겠다.
대구에서의 일박이일이 환상 속에서 흘러간 듯하다. 모든 것이 안성맞춤이어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환대를 받았다. 동대구역까지 차로 배웅해주기까지 허 선생님 부부의 세심한 배려는 고맙기 그지 없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같이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거부감이나 불편함이 전혀 없는 걸 보면 통하는 인연이란 게 따로 있는 것 같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회상하는 대구에서의 순간들은 정말 좋은 기억들 뿐이다. 가을 들꽃 한창이던 대덕산 숲길, 아름다운 건축미를 간직한 팔공산 무인산장에서의 일박, 송이순두부찌개, 마가목 열매로 담근 술, 북어포를 넣은 라면, 산 속에서의 원두커피, 숨겨놓은 듯한 너럭바위, 보리밥 등과 함께 산을 닮은 허 선생님 부부의 따뜻한 마음까지 영원히 잊히지 않을 추억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한 나의 가을 여행이었다.
1. 대덕산 산길은 비교적 넓어서 두 사람이 얘기 나누며 걷기에 적당하다.
2. 대덕산 정상에 있는 안내판.
3. 대덕산을 오르는 길 중간의 전망 바위에서 내려다본 조망.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전국체전이 열린다고 한다.
4. 대덕산 등산로 주변엔 활짝 핀 구절초가 유난히 많다.
5. 대덕산을 내려온 지점에 위치한 저수지. 숲을 담아낸 물빛이 청아하다.
6. 대구등산학교의 교육장으로 사용된다는 팔공산의 무인산장.
7. 산장의 머릿돌.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글씨체도 경쾌하다.
8. 산장의 옆 모습. 자연석을 잘 쌓아올린 모습. 벽난로의 흔적과 굴뚝 모습도 예쁘다.
9. 산장은 아름드리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물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10. 산장 내부. 침상도 깨끗하게 청소가 잘 되어있다. 이용하는 대구 등반가들의 애정이 담긴 정갈함이 엿보인다.
11. 동화사의 말사인 염불암. 팔공산 팔부 능선에서 동화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12. 돌이끼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부조 불상의 표정이 토속적이다.
13. 염불암 앞마당에서 어딘가를 보고 계시는 허 선생님 부부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숲은 단풍을 준비하고 있는 듯.
14. 팔공산에는 멋들어진 소나무 숲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15. 오솔길을 휘돌아가며 내려오는 길이 퍽퍽하지 않아서 좋다.
16. 요즘엔 지방마다 둘레길이 잘 정비돼 있으니 좋다. 대구올레의 상징인 운동화 디자인이 괜찮아 보인다.
17. 수태지계곡길을 걷다보면 나타나는 너럭바위.
18. 계곡물이 휘돌아나가는 너럭바위는 안마당처럼 널찍하다.
19. 너럭바위의 가장자리를 흘러내려가는 계곡물이 맑고 청아하다.
20. 숨어있는 듯한 소폭포가 너럭바위 앞에서 조그마한 소를 이룬다.
21. 오랜 지기처럼 편안하게 나를 환대해준 허 선생님 부부에게 깊히 감사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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