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억새철이다. 단풍철보다 약간 빠르게 억새는 절정을 이룬다.
억새로 유명한 산 중에선 월출산, 천관산, 그리고 어제의 명성산이 생각난다.
정선의 민둥산이나 영남알프스의 화왕산과 신불평원의 억새도 유명하다.
관광버스로 이들 산을 점령해버리는 우리네 나들이 풍속이 여러가지로 아쉽다.
앞으로 사람 구경하기 위해서 단풍철이나 억새철에 유명한 산들을 찾을 것 같지는 않다.
산 속에서까지 붐비는 사람 속에서 여유를 잃고 싶지는 않으니까.
명성산 억새 평원을 거닐면서 억새에 대한 몇 가지 단상들이 떠올랐다.
먼저 내가 가본 월출산, 천관산, 명성산의 공통점은 멀리서 보면 모두가 험준한 바위산이란 것이다.
월출산 미왕재의 억새밭이나, 천관산 환희대부터 정상에 이르는 능선을 수놓고 있는
은빛 억새의 물결은 바위산을 두어시간 올라야 맞이할 수 있다.
명성산도 산정호수쪽에서 보면 책바위를 비롯한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처럼 단단한 바위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연약한 억새를 품고 있는 바위산은
무뚝뚝한 사내의 마음 속에 오히려 여리고 착한 심성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반전을 보여준다.
억새는 보기보다 사진을 잘 받는다.
억새 자체가 화려하기보다는 억새를 배경으로 한 사진이 편안하고 피사체를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꽃밭에서 찍은 인물 사진보다 억새밭에서 찍은 사진이 더 마음에 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억새는 홀로 있을 땐 보잘것 없지만 넓은 평원을 가득 채울 때엔 장관을 이룬다.
은빛 억새꽃이 바람에 일렁이면 철새들의 군무와도 같은 장엄함을 연출한다.
단풍보다 조금 먼저 와서 화려한 단풍철을 예비하는 서곡처럼 가을을 적신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 때문에 남들이 돋보이게 하는 겸손함을 억새는 간직하고 있다.
친구가 힘들 때, 여러가지 말로 충고하고 위로해주는 사람보다
그냥 함께 있어주고 같이 아파해주는 사람이 훨씬 더 좋은 친구라고 한다.
억새는 꼭 이런 친구의 심성을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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