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위대한 인간으로의 예수, 프랭클린, 안창호, 소크라테스

빌레이 2011. 2. 15. 07:40

2011년 한 해를 계획하면서 닮아 가고 싶은 위인을 찾던 중 네 명의 인물이 내게 다가왔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몸으로 공생애를 사셨던 시기의 예수에 국한한다.

성경의 사 복음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예수의 전기로만 보더라도 훌륭한 책이라 생각한다.

 

지난 몇 년간 연초가 되면 항상 요한복음을 영어로 읽는 습관이 있었다.

수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게는 가장 논리 정연한 글이어서 영어로 읽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요한복음이 아닌 마태복음으로 한 해를 시작했다. 예수의 생애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고,

그 것을 비교적 정확히 묘사한 책이 마태복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죽음의 고통까지 감내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예수의 모습은 항상 감동적이다.

 

프랭클린과 안창호는 미국과 대한민국의 건국 초기에 제대로 된 기틀을 마련한 정신적 지주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프랭클린이 독립전쟁 이후까지 건재하여 부강한 미국의 빛나는 초석이 된 반면,

광복을 보지 못한 1938년도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안창호의 삶이 우리 민족으로선 안타깝기 그지없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안창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건전한 정치문화가 자리매김 했을 것이다.

<프랭클린 자서전>과 춘원이 쓴 <도산 안창호>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대비되었던 측면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누구보다 실천적인 선각자였다는 점이다. 공상이나 공허한 이론을 가장 싫어한 위인이었다.

 

플란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그의 다른 대화편과 함께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해준다.

오만과 위선으로 가득찬 당대의 귀족들인 소피스트들로부터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현혹시킨다는,

오늘날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죄목으로 사형까지 당하는 소크라테스의 최후 모습을

그의 애제자인 플라톤이 기록한 책이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이다.

이 책들을 읽다보면 소크라테스를 왜 서양철학의 시조로 여기는지를 단적으로 느낄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는 어쩌면 그렇게 예수를 닮았는지 모르겠다.

소크라테스가 4백여 년 전의 인물이기 때문에 예수가 소크라테스를 닮았다고 해야 맞을 수도 있겠다.

 

사람이 책을 읽기만 하고 삶에서 달라지는 면이 조금도 없다면 독서는 무의미하다.

단순한 지적 유희에 머무르는 독서는 오히려 오만과 독선에 빠질 우려가 있다.

위인전을 읽고 나서 그들의 삶에서 일시적인 감동만을 느낀다면, 이 또한 지적 유희에 빠져 고상한 체 하는 위선자가 되기쉽다.

벌써 2월이 절반 넘게 흐른 지금, 나는 이들의 삶으로부터 감동하고 느낀 바는 많지만 제대로 실천한 것은 아직 없다. 깊히 반성할 일이다.

예수, 프랭클린, 안창호, 소크라테스의 삶은 올 한 해를 보내는 동안 모든 면에서 나의 귀감이 될 것이다.

연말에 돌아보았을 때, 이 네 사람에 대해 읽었던 것이 조금이나마 나를 성장시켰다고 회고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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