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에서 금요일 밤 열 한 시에 출발하는 산악회 버스에 승차합니다. 무박으로 설악을 다녀오는 일정입니다. 한계령과 미시령 갈림길에 위치한 내설악광장 휴게소에서 잠시 머무른 뒤 버스는 두 시 사십분에 한계령으로 길을 잡습니다. 사십 명 정원의 버스에 스물 일곱 명이 탔습니다. 내설악 휴게소에도 평소 주말과 달리 산악회 버스는 세 대 뿐입니다. 유난히 추운 올겨울 날씨 때문인지 설악산을 찾는 산객들도 많이 줄어든 모양입니다.
오색의 남설악 공원관리소 입구로 설악에 든 시각은 새벽 세 시 이십 분 경입니다. 달이 참 밝습니다. 휘엉청 밝은 달빛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청아한 달이 좋습니다. 별들도 많은데 달빛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선명하지 못합니다. 오색을 출발하여 대청봉에 올라 일출을 보고, 중청, 소청을 지나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여 설악동에 이르는 코스를 잡습니다. 가파른 오르막 돌길은 여전합니다. 가도 가도 힘겨운 오르막의 연속인 이 길이 나를 몹시 힘들게 합니다.
산에 오기 전 논문 수정 때문에 마음을 좀 끓였습니다. 불편한 마음과 좋지 못한 속사정 때문에 멀미가 났습니다. 설악의 겨울 바람은 어느 때보다 세차게 불어제낍니다. 우모복과 동내의를 입었어도 한기가 느껴지는 혹한입니다. 가파른 오르막 중간에 기어코 구토를 합니다. 준비해간 멀미약을 먹으니 좀 나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졸음이 쏟아집니다. 한 발 오르고 잠깐 졸고, 또 한 발 오르고 잠깐 졸기를 반복합니다.
추워서 쉴 생각을 못합니다. 괜히 생고생 한다는 후회가 절로 나옵니다. 사실 버스에서 내리기 싫은 몸 상태였는데 후회할까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만큼은 포기하지 못한 미련함을 후회합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길 가에 철퍼덕 퍼질러 앉습니다. 달빛은 밝은데 서북릉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나를 더욱 춥게 합니다. 그래도 따뜻한 물에 초코렛과 사탕을 입속에 집어 넣으니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여섯 시가 넘었습니다. 대청봉 일출을 보기 위해선 서둘러야 합니다.
동쪽 하늘엔 여명이 붉게 물들어갑니다. 마지막 힘을 내 보니 어느 새 대청봉 정상입니다. 많은 이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일출을 기다립니다. 힘들게 천천히 올라온 것이 오히려 일출 기다리는 시간의 추위는 겪지 않게 해줍니다. 대청봉 정상에서 오 분 정도 기다린 후에 선명한 일출을 감상합니다. 일출 때의 살아 있는 붉은 해의 모습은 모두의 마음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솜털 같은 구름바다 위로 넘실대며 솟아오르는 일출을 설악의 대청봉에서 맞이한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일출의 기쁨도 잠시 대청봉엔 세찬 겨울 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강한 풍속입니다. 중청산장으로 내려서는 길 중간에 공룡능선을 넘실대며 흘러 넘치는 구름폭포를 봅니다. 드물게 보는 장관입니다. 점봉산과 귀때기청 쪽은 두터운 구름 바다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추위에 떨어도 모든 것이 좋습니다. 중청산장의 취사실에서 햇반과 카레를 동시에 넣고 끓인 카레죽으로 아침을 해결합니다. 몸도 따뜻해지고 음식도 꿀맛입니다. 지난 번 지리산 종주할 때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요리가 이제는 저의 고유 메뉴 중 하나가 됐습니다. 옆에 사람이 그 요리 어떻게 하냐고 물어봅니다. 간단히 해서 먹는 게 신기했나 봅니다.
다시 소청을 향해 천천히 길을 내딛습니다. 소청에서 보는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은 언제 봐도 사랑스럽습니다. 소청에서 희운각에 이르는 길은 눈이 많이 쌓여 힘든 내리막이었습니다. 간간히 엉덩이 썰매를 과감하게 몇 번 타봅니다.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고 재미 있었습니다. 희운각에서 양폭산장에 이르는 내리막에서도 엉덩이 썰매는 계속 타니 즐거울 뿐입니다. 희운각과 양폭산장은 공단에서 인수하여 새롭게 단장되었습니다. 말끔하게 단장된 것이 좋기는 하지만 뭔가 어설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길로 이어진 천불동 계곡 하산길은 언제나 그렇듯 지루합니다. 왼쪽 무릎에 통증이 생겨 천천히 내려옵니다. 설악동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한 시 반경입니다. 열 시간 정도의 산행이었지만 추위와 좋지 못한 몸상태로 힘겨운 길이었습니다. 세 시 반에 출발한 버스에 승차 하자마자 죽음 같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 것이 힘들기는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힘든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힘들어도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의 설악산 등반도 힘들지만 매우 좋은 것 중의 하나입니다.
설악 한 가운데 세찬 겨울 바람 속에서도 휘엉청 밝게 빛나던 그 달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희미한 여명을 가르고 꿈틀대며 이글거리면서 희망을 품고 떠오르던 대청의 일출을 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휩쓸고 갈 듯한 설악의 그 웅장한 바람소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찾는 이에게 늘 새로운 감동을 전해주는 설악의 명봉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침의 신비함을 더해주는 구름바다와 공룡릉을 넘어 내설악과 외설악을 넘나들던 구름폭포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잊히지 않을 설악의 감동 속에 내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가슴 벅차고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1. 몸 상태가 안 좋아 춥고 힘들었지만 대청봉 정상에 올라 일출을 보니 모든 게 좋아졌다...
2. 오색에서 올라와 일출을 기다리는 산객들... 구름 위의 일출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이고...
3. 구름 위로 솟아 오르는 해가 이렇게 또렷하기는 드물 것... 많이 본 일출이지만 대청의 일출은 또 다른 감동...
3. 대단한 풍속 때문에 휘청이는 산님들... 대청봉 바람은 너무 세차다...
4. 소청에서 희운각 가는 길에 보이는 사면... 속을 훤히 드러낸 설악... 듬선 듬성 하지만 의연하게 서 있는 상록수...
5. 공룡능선을 넘어 내설악에서 외설악으로 흘러 넘치는 구름폭포... 세찬 바람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한 촬영...
6. 중청산장 가는 길... 산장에서의 아침 식사는 꿀맛... 몸도 녹이고 배도 불리고...
7. 항상 그 자리에서 우리들을 새롭게 반겨주는 공룡릉의 명봉들... 1275봉, 범봉...
8. 소청에서 희운각 가는 길 전망대에서 한 컷... 좌로 신선봉과 우로 화채릉을 조망할 수 있는 곳... 추위에 볼이 발갛게..ㅎㅎ
9. 대청봉 내려서는 길에 뒤돌아본 대청사면... 저 멀리 운해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10. 천불동의 폭포는 모두 빙폭으로 변해 있다... 하지만 물소리가 들린다... 봄은 올 것이다...
11. 중청에서 소청 가는 길... 응달진 곳이라서 눈이 가장 많이 쌓여 있던 곳... 겨울산 분위기 제대로 나던 곳...
12. 소청 내려서는 나무 계단... 용아장성과 공룡릉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
13. 죽음의 계곡에 쌓인 눈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화채릉과 만경대도 오늘따라 선명하다...
14. 아무래도 용아장성은 소청에서 내려다 볼 때가 가장 예쁘다...
15. 희운각도 이제는 공단에서 관리한다. 깨끗하게 리모델링해서 좋기는 한데... 할 거면 제대로 하던지... 뭔가 부족한...
16. 천불동 계곡의 아름다운 절벽미는 겨울에도 여전하다...
17. 양폭산장도 새롭게 단장했다... 하지만 겨울에 실내 취사장을 개방하지 않는다... 이건 산장이 아니다...
18. 지리산 종주할 때 여유부리다 보지 못했던 일출을 대청에서 보니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되는 것 같다... 뿌듯하고 감사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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