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 (2010년 1월 22일 밤 ~ 1월 24일 저녁)
- 1월 22일 밤 10시, 동대문역주차장 출발 (유명산우회 28인승 우등버스, 회비 8만5천 원)
- 1월 23일 새벽 4시, 성삼재 출발, 오후 5시 세석산장 도착 1박
- 1월 24일 새벽 4시 30분 세석산장 출발, 12시 정각 중산리 도착, 중식 후 오후 2시 버스 출발, 6시 30분 동대문역 도착.
지리산 종주는 항상 내 마음 속에 있었다. 사람이 적은 겨울철에 꼭 한 번 지리산 능선을 밟고 싶었다.
백무동과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원점산행 형식으로 다녀온 적은 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정상까지 산책하듯 다녀온 적도 있다.
하지만 백두대간의 초입인 지리산 주능선길을 밟아보는 것이 지리산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그 제대로 된 산행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뿌듯하고 기뻤다.
새벽 네시에 성삼재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예상보다 많은 산꾼들로 등로 입구는 북적인다.
스패치, 아이젠, 스틱 등의 동계 장비를 착용하는 일은 늘 번거롭다. 온기가 있는 화장실에서 많은 이들이 산행 준비를 한다.
노고단에 이르는 넓은 임도는 산객들의 발자국 소리로 가득하다. 서서히 일행들은 흩어진다.
종주길의 특성 상 많은 인원이 모여서 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자기 능력에 맞는 산행을 해야 한다.
나도 일행들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길을 간다. 벽소령산장에서 오후 2시 30분 전에만 세석으로 출발하면 된다.
노고단 정상 우회로부터 본격적인 종주길이다. 예전엔 노고단 정상을 개방했었는데 요즘은 시간제로만 개방한다는 안내문이 있다.
다음 휴식처로 생각한 연하천 산장은 생각보다 멀다. 예전엔 중간에 뱀사골산장이 있었는 데 지금은 터만 남았다.
뱀사골산장 꼭 그 자리에 산장이 있으면 참 좋은 휴식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버스로 밤을 달려온 탓인지 갈수록 힘겨워지는 산행이다. 추운 날씨에 힘들고 지쳐도 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겨울 산행의 가혹함이다. 가도 가도 연하천산장은 나타날 기미가 없고 무심한 표지판은 그저 몇 킬로 남았다는 통보만 해준다.
끝도 없는 나무 계단길을 한참 지나니 연하천산장이다. 반갑고 또 반갑다. 하지만 취사장엔 발 디딜 틈도 없다.
할 수 없이 야외 취사장에서 빵과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그래도 좋다. 이 산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힘에 겨워 벽소령산장 통과 시간을 걱정했었는데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다. 잠깐 동안의 휴식이 큰 에너지를 주는 것 같다.
연하천산장에서 벽소령산장까지는 참을만 하다. 벽소령산장엔 따뜻한 햇살이 머물고 있어서 정말 좋았다.
실내 취사장에도 사람이 많지 않아서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라면과 햇반으로 배를 채운다.
따스한 햇살을 받고 뜨거운 국물이 몸 속에 들어가니 살 것 같다. 다시 힘을 내서 잠자리가 있는 세석산장으로 향한다.
오후 한 시 반경에 벽소령산장을 출발한다. 햇빛 받으며 걷는 등로는 완만하여 동네 산책길이 따로 없다.
무거운 배낭과 동계 장비를 착용한 둔한 몸 때문인지 피로가 온 몸에 내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등반 초기보다는 좋다.
벽소령 통과 시간을 여유있게 지켰다는 것과 일몰 전에 세석에 갈 수 있을 것이란 여유로움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중간 중간 조망터나 이정표 근방에서 휴식을 취하며 만만디 산행을 이어간다.
영신봉 기암이 마주 보이는 테라스에서 한참을 쉰다. 겨울 햇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사진 촬영도 좀 해본다.
응달진 곳의 설화는 천국 같은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추워서 빨리 통과 하고픈 생각에 사진 찍을 생각도 안 한다.
영신봉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세석산장의 안온한 분위기가 내집처럼 느껴진다.
해외출장을 다닐 때 하루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호텔은 내집처럼 편안히 느껴질 때가 있다. 오늘의 세석산장이 그렇다.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각인 다섯 시 경에 도착한 산장은 많이 춥다. 취사장은 그야말로 전쟁터다.
그래도 이 한 몸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마련해본다. 카레와 햇반을 죽처럼 같이 끓여서 먹는 저녁이 꿀맛이다.
땀으로 젖은 속옷을 갈아입고 일곱 시 반경에 잠자리에 든다. 죽음 같이 깊은 잠을 잤다.
새벽 세 시 반경에 기상하여 출발 준비를 서두른다. 다행히 몸은 가뿐하다. 간단히 빵으로 요기하고 출발한다.
버스는 오후 두 시 정각에 중산리를 출발한다. 그 전에만 도착하면 되니 시간은 충분하다.
하늘의 별이 어찌나 많은지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촛대봉까지 이르는 길에 두어번 렌턴 불을 끄고 별을 감상한다.
사방은 더없이 고요하고 산 아래 마을들의 불빛이 예쁘게 반짝인다. 하늘의 별도 마을 불빛도 산객들의 헤드렌턴 빛도 모두 아름답다.
맑은 하늘, 맑은 공기에 내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어제의 고생길은 오늘의 이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한 준비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봉우리 몇 개를 올라도 힘들지가 않다.
연화봉 지나서 드넓은 장터목이 보인다. 천왕봉 일출을 기대하며 제석봉을 향해 오르는 불빛들이 줄을 선다.
별빛과 저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의 선명함으로 보아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일출이 될 듯 싶다.
장터목산장에서 몸을 녹이고 천왕봉으로 향한다. 제석봉 세찬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서두르면 일출을 볼 수 있겠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일출에 대한 욕심보다 서두르지 않고 유유히 걷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하다.
통천문 지나니 해는 천왕봉 너머로 떠오른다.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사광에 비치는 산의 모습에 만족한다.
떠오른 해의 각도에 따라 선명해지는 산줄기의 윤곽이 아름답다. 멀리 보이는 구름띠와 강줄기가 예쁘다.
천왕봉에서 한참을 머물러도 좋다. 세찬 겨울 바람이 나를 밀어부치지만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본다.
법계사 방향으로의 하산길은 심적으로 편한 길이다. 종주를 마친 이들이 다 그럴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통과하는 개선문이 중간에 있다는 것도 재미 있다.
로타리 산장에서 여유부리며 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 햇반에 김을 넣고 죽처럼 끓여 먹으니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맛이다.
산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에 일부러 천천히 하산한다. 주일이라 당일코스로 천왕봉 오르는 이들이 많다.
그렇게 여유부리며 중산리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 무렵이다. 뿌듯하고 대견하고 감사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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