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등반이 내 인생에 들어온 이후로 요세미티 원정 등반은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튼 채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던 소망이었다.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 그날을 상상하면서 미국 서부와 요세미티의 암벽등반지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첫 안식년 기간이던 2010년 6월에 나홀로 유럽알프스 트레킹을 다녀온 직후, 등산학교에서 암벽과 빙벽등반을 배웠다. 하지만 이듬해 등반 중 불의의 발목 골절상을 당하고 말았다. 수술 후 재활에 매진하던 시기인 2011년 8월에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미국 UCSB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는 출장길에 올랐었다. 출장 일정을 마치고 휴가를 내어 동료교수들과 함께 2박 3일 동안 요세미티 국립공원 일대를 자동차로 샅샅이 훑고 다녔다. 요세미티의 절경을 두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암벽등반을 다시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던 시기였다.
완만한 산길을 오래 걷는 것으로 재활을 한 것이 성공적이어서 정상적인 몸상태가 되었을 때, 다시 클라이밍의 매력에 빠질 수 밖에 없었고, 이후로는 등반이 내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2013년 7월엔 보름 동안 프랑스 샤모니-몽블랑 산군에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알파인 등반을 경험했다. 암벽과 빙벽등반 장비들을 모두 사용한 나의 첫 해외 등반이었고, 불과 3년 전에 트레킹을 하는 구경꾼 입장에서 신기하게 바라보던 클라이머들의 모습이 나 자신이 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의 가슴 설레이던 모든 순간들은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알프스 등반 이후로 해외 등반여행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주중엔 실내 암장에서 운동하고, 주말이면 암벽등반을 즐기는 패턴의 일상을 살아온 기간도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겼다. 코로나 펜데믹이 엔데믹으로 전환된 작년에 아내와 함께 12일 일정으로 스위스 알프스 트레킹을 다녀왔다. 한여름에 설산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풍광의 알파인 지대를 걷는 순간이 즐겁기는 했으나, 트레킹을 하는 동안에도 내 눈은 자꾸만 암빙벽과 설릉 위의 클라이머들을 쫒고 있었다. 트레킹 만으로는 더이상 채워지지 않는 어떤 갈급함이 느껴졌다. 등반 실력은 미천할지라도 이미 내 몸 속 어딘가엔 클라이머로서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해외 등반여행에 대한 소망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올해 2월 초에 홍대클라이밍센터를 운영하고 계신 윤길수 선생님께서 올리신 요세미티 등반 공지를 만나게 되었다. 운명처럼 다가온 이 공지를 보자마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영형과 윤선생님께 전화하여 참석을 결정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등반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윤선생님과 대학시절부터 친형처럼 따르는 기영형이 함께 하고, 일정까지 여름방학 기간에 속해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건 굴러온 복을 제발로 걷어차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아포리즘(aphorism)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실천한 결정이기도 했다.
예년보다 빡빡한 학기 중의 일상 속에서도 요세미티 원정을 준비하기 위한 주말 등반과 주중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틈나는 대로 스티브 로퍼가 쓴 <캠프4>를 읽으면서 요세미티 등반여행에 대한 희망을 키웠다. 여러 등반지에 관련된 전설적인 클라이머들의 활약상과 등반사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다. 최종적으로 결성된 등반대는 6명으로 구성되었다. 윤선생님, 기영형, 나, 이렇게 셋은 60대와 50대 후반의 OB(Old Boy)팀이고, 지선씨, 가을씨, 아란씨, 세 명이 40대 초반과 30대의 YB(Young Boy)팀을 이루었다. 나를 제외한 5명 모두는 홍대클라이밍센터 소속이니, 굳이 6명의 등반대를 연령대와 소속으로 구분하지면, '6=3+3=5+1'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등반여행 내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야말로 우리는 모든 면에서 탁월한 리더이신 윤선생님의 지휘 하에 미국에서의 15박 16일 전일정 내내 완벽에 가까운 원팀(One team)으로 움직였다.
라스베가스 호텔에서 하룻밤 머문 것을 제외한 14박을 캠핑장에서 보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해외에서 캠핑을 함께 하다보면 멤버들 간에 소소한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번 등반대는 시종일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팀웍을 보여주었다. '좋다'는 '조화롭다'에서, '나쁘다'는 '나 뿐이다'에서 연유했다는 해석이 있다. 이를 빌리자면, 구성원들 모두가 조화롭게 움직였던 '2024 미국 요세미티 등반대'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환상적인 팀이었다. 여러모로 부족함 많은 내가 자랑스런 그 팀의 일원이었던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감사한 그 마음을 담아 이제부터 틈틈이 이번 등반여행에 대한 졸필의 기록을 남겨볼 요량이다. 우선은 우리들의 행복하고 가슴 벅찼던 여정을 사진과 함께 일별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