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빙벽등반/해외등반여행

[2024 미국 서부와 요세미티 등반여행 - 프롤로그] 카르페 디엠(Carpe diem)

빌레이 2024. 7. 15. 12:31

암벽등반이 내 인생에 들어온 이후로 요세미티 원정 등반은 마음 한구석에 또아리를 튼 채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던 소망이었다.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 그날을 상상하면서 미국 서부와 요세미티의 암벽등반지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첫 안식년 기간이던 2010년 6월에 나홀로 유럽알프스 트레킹을 다녀온 직후, 등산학교에서 암벽과 빙벽등반을 배웠다. 하지만 이듬해 등반 중 불의의 발목 골절상을 당하고 말았다. 수술 후 재활에 매진하던 시기인 2011년 8월에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미국 UCSB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는 출장길에 올랐었다. 출장 일정을 마치고 휴가를 내어 동료교수들과 함께 2박 3일 동안 요세미티 국립공원 일대를 자동차로 샅샅이 훑고 다녔다. 요세미티의 절경을 두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암벽등반을 다시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던 시기였다. 완만한 산길을 오래 걷는 것으로 재활을 한 것이 성공적이어서 정상적인 몸상태가 되었을 때, 다시 클라이밍의 매력에 빠질 수 밖에 없었고, 이후로는 등반이 내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2013년 7월엔 보름 동안 프랑스 샤모니-몽블랑 산군에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알파인 등반을 경험했다. 암벽과 빙벽등반 장비들을 모두 사용한 나의 첫 해외 등반이었고, 불과 3년 전에 트레킹을 하는 구경꾼 입장에서 신기하게 바라보던 클라이머들의 모습이 나 자신이 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의 가슴 설레이던 모든 순간들은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알프스 등반 이후로 해외 등반여행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주중엔 실내 암장에서 운동하고, 주말이면 암벽등반을 즐기는 패턴의 일상을 살아온 기간도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겼다. 코로나 펜데믹이 엔데믹으로 전환된 작년에 아내와 함께 12일 일정으로 스위스 알프스 트레킹을 다녀왔다. 한여름에 설산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풍광의 알파인 지대를 걷는 순간이 즐겁기는 했으나, 트레킹을 하는 동안에도 내 눈은 자꾸만 암빙벽과 설릉 위의 클라이머들을 쫒고 있었다. 트레킹 만으로는 더이상 채워지지 않는 어떤 갈급함이 느껴졌다. 등반 실력은 미천할지라도 이미 내 몸 속 어딘가엔 클라이머로서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해외 등반여행에 대한 소망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올해 2월 초에 홍대클라이밍센터를 운영하고 계신 윤길수 선생님께서 올리신 요세미티 등반 공지를 만나게 되었다. 운명처럼 다가온 이 공지를 보자마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영형과 윤선생님께 전화하여 참석을 결정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등반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윤선생님과 대학시절부터 친형처럼 따르는 기영형이 함께 하고, 일정까지 여름방학 기간에 속해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건 굴러온 복을 제발로 걷어차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아포리즘(aphorism)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실천한 결정이기도 했다.            

 

예년보다 빡빡한 학기 중의 일상 속에서도 요세미티 원정을 준비하기 위한 주말 등반과 주중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틈나는 대로 스티브 로퍼가 쓴 <캠프4>를 읽으면서 요세미티 등반여행에 대한 희망을 키웠다. 여러 등반지에 관련된 전설적인 클라이머들의 활약상과 등반사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다. 최종적으로 결성된 등반대는 6명으로 구성되었다. 윤선생님, 기영형, 나, 이렇게 셋은 60대와 50대 후반의 OB(Old Boy)팀이고, 지선씨, 가을씨, 아란씨, 세 명이 40대 초반과 30대의 YB(Young Boy)팀을 이루었다. 나를 제외한 5명 모두는 홍대클라이밍센터 소속이니, 굳이 6명의 등반대를 연령대와 소속으로 구분하지면, '6=3+3=5+1'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등반여행 내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야말로 우리는 모든 면에서 탁월한 리더이신 윤선생님의 지휘 하에 미국에서의 15박 16일 전일정 내내 완벽에 가까운 원팀(One team)으로 움직였다. 라스베가스 호텔에서 하룻밤 머문 것을 제외한 14박을 캠핑장에서 보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해외에서 캠핑을 함께 하다보면 멤버들 간에 소소한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번 등반대는 시종일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팀웍을 보여주었다. '좋다'는 '조화롭다'에서, '나쁘다'는 '나 뿐이다'에서 연유했다는 해석이 있다. 이를 빌리자면, 구성원들 모두가 조화롭게 움직였던 '2024 미국 요세미티 등반대'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환상적인 팀이었다. 여러모로 부족함 많은 내가 자랑스런 그 팀의 일원이었던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감사한 그 마음을 담아 이제부터 틈틈이 이번 등반여행에 대한 졸필의 기록을 남겨볼 요량이다. 우선은 우리들의 행복하고 가슴 벅찼던 여정을 사진과 함께 일별해 보기로 한다.     

     

▲ 캠핑장비와 암벽등반 장비가 담긴 11kg과 21kg 무게의 카고백 2개의 수하물과 기내 반입 가능한 배낭 1개로 짐을 꾸렸다. 허용된 양은 23kg 이하의 수하물 2개.
▲ 우리가 탔던 왕복 비행기는 아시아나 항공사의 A380 기종으로 가장 큰 여객기. 2024년 6월 28일(금) 20:40 인천공항 출국, 같은 날 16:00 LAX공항 도착. 돌아오는 여정은 7월 13일 23:00 LAX공항 출발, 7월 15일(월) 04:00 인천공항 입국.
▲ 선발대로 오전에 도착한 YB팀이 공항에서 OB팀을 픽업하여 LA의 한인식당으로 이동. 이성인 선배님께서 사주신 푸짐한 저녁식사로 미국에서의 일정 시작.
▲ LA 한인마트에서 추가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 후 밤길을 달려 비숍과 맘모스타운 사이의 캠핑장으로 이동.
▲ 6월 29일(토), 02시가 넘어서 도착한 크롤리레이크 캠핑장.
▲ 6월 29일(토) 아침의 크롤리레이크 캠프사이트.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라서 간밤에 패딩을 입고 자야했다. 뒤로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펼쳐지고 앞으로는 크롤리레이크가 내려다보이는 캠프사이트에서 2박을 했다.
▲ 6월 29일(토), 첫 등반지인 오웬스 리버 고쥐(gorge)의 고난도 루트를 등반 중이신 윤선생님의 모습.
▲ 6월 29일(토), 오후엔 나도 쉬운 루트에서 선등을 했다. 긴장감 속에 미국에서의 첫 선등이라는 만족감이 있었다.
▲ 6월 30일(일), 요세미티 밸리의 캠프4 입성. 북쪽엔 요세미티 폭포, 남쪽엔 센티넬록이 선명히 보이는 명당인 60번 사이트에서 7박 8일을 보냈다.
▲ 요세미티에서의 첫 날은 로컬 클라이머를 능가하는 윤선생님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엘캐피탄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작.
▲ 엘캐피탄을 배경으로 등반대 6명이 첫 단체사진을 남겼다.
▲ 익스플로레이션 센터에서 요세미티 암벽등반에 관한 전시물들을 구경하면서...
▲ 스티브 로퍼가 쓴 책인 <캠프4> 속에 나오는 등반지에 대한 설명과 실물을 대하는 기쁨이 있었다.
▲ 7월 1일(월), 머뉴어파일 버트레스 사이트의 '너트크랙커' 루트 등반.
▲ '너트크랙커' 1피치의 크럭스를 잘 넘어서서 시야가 열리는 2피치 확보점에서...
▲ 라스트를 맡은 내가 '너트크랙커' 2피치에 도착한 순간. 내 뒤로 미들캐시드럴록이 병풍처럼 서있다.
▲ 요세미티에서의 첫 등반인 '너트크랙커' 정상에 선 OB팀.
▲ '너트크랙커' 정상의 YB팀.
▲ 7월 2일(화), 처치보울(Church Bowl) 사이트의 '비숍스 테라스(Bishop's Terrace)' 루트 등반. 초원 너머로 움푹 패인 테라스가 보인다.
▲ '비숍스 테라스' 1,2피치를 단피치로 올랐다.
▲ 비숍스 테라스에 도착한 순간...
▲ 천혜의 쉼터인 비숍테라스에서는 하프돔의 일부분이 가까이 보인다.
▲ 다음 날 대망의 엘캐피탄 '이스트 버트레스' 등반을 위해 꼼꼼히 장비를 챙기고...
▲ 7월 3일(수),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엘캐피탄 '이스트 버트레스' 등반. 토미 콜드웰의 이름을 딴 'TC프로' 암벽화의 탄생지도 엘캐피탄이라 할 수 있다.
▲ 5명의 대원들이 무사히 '이스트 버트레스'를 완등하고,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오후 7시에 귀환할 수 있었다. 장장 15시간의 등반이었다.
▲ 7월 4일(목), 미국의 공휴일인 독립기념일, 오전엔 기영형과 함께 요세미티 밸리 루프를 걸었다.
▲ 홍대클라이밍센터의 별칭인 '애스트로맨' 루트가 있는 워싱턴 칼럼과 노스돔의 실물도 영접하고...
▲ 7월 4일(목) 오후, 이성인 선배님과 함께 글래시어포인트로 가는 중간의 터널뷰포인트에서...
▲ 글래시어포인트에서... 하프돔, 네바다폭포, 버널폭포, 그리고 아득히 먼 곳의 캐시드럴피크까지 잘 보였다.
▲ 이성인 선배님과 윤선생님은 차로 귀환하시고, 5명은 '4마일 트레일'을 걸었다.
▲ 글래이시어포인트에서 요세미티 밸리로 내려오는 4마일 트레일은 경치가 으뜸이었다.
▲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하시고, 윤선생님과 함께 엘캐피탄 노즈와 하프돔 레귤러 루트를 등반하신 재미 산악인 이성인 선배님께서 손수 가져오신 스테이크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최상의 맛이었다.
▲ 밤이면 캠프사이트에서 맥주 한잔에 등반관련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 7월 5일(금), 처치보울 사이트에서 이성인 선배님과 함께 등반한 날.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바위를 오르시는 열정이 존경스러웠다.
▲ 일찍 기상한 날이면 고요한 요세미티 밸리를 산책했다.
▲ 7월 6일(토), 글래시어포인트 에이프런(Apron) 사이트에서 등반할 계획이었으나, 너무 더운 날씨에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아서 등반은 접고 폭포 트레킹에 나서기로 했다.
▲ 커리빌리지 뒤의 주차장에서 잠시 간식을 먹고 트레킹에 나섰다.
▲ 먼저 버널폭포가 나오고...
▲ 안개비가 날리는 버널폭포 주변에서 무지개를 보았다.
▲ 땡볕을 무릅쓰고 상부의 네바다폭포까지 다녀왔다.
▲ 7월 7일(일), 정들었던 캠프4의 60번 사이트를 떠나는 날이다.
▲ 요세미티를 벗어나는 길에 테나야 호수를 잠시 둘러보고...
▲ 7월 7일(일), 맘모스타운과 비숍 사이에 위치한 프렌치 캠프그라운드에서 1박을 했다.
▲ 7월 7일(일), 첫 등반지였던 오웬스 리버 고쥐의 다른 사이트에서 등반했다.
▲ 오웬스 고쥐는 그늘진 사이트를 찾아다닐 수 있고, 시원한 강물이 흐르는 천혜의 등반지였다.
▲ 7월 8일(월), 라스베가스 인근의 레드록 캐니언을 찾았다.
▲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그늘진 레드록 캐니언의 사이트에서 처음으로 접한 사암의 부드러운 암질을 만끽했다.
▲ 레드록 캐니언은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등반해보고 싶은 매력적인 등반지였다. 이날 숙박지는 라스베가스 호텔.
▲ 7월 9일(화), 검은색 바위가 인상적이었던 뉴잭시티(New Jack City, 현재 명칭은 Sawtooth Canyon)에서 등반할 계획이었으나, 그늘막을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의 땡볕과 뜨거운 바위 때문에 점심만 먹고 철수했다.
▲ 7월 9일(화) 오후, 조슈아트리 국립공원 캠핑장 입성.
▲ 물이 없는 캠핑지였지만 우리만의 낭만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던 조슈아트리 캠핑장이었다.
▲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 모두가 바위에 드러누워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던 순간은 그리운 추억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광을 보여준다. 정면 바위에 유명한 루트인 사선으로 뻗어내린 스키크랙이 선명하다.
▲ 7월 10일(수), 조슈아트리의 시그니처 코스라 할 수 있는 '일루전 드웰러' 루트를 등반했다.
▲ '일루전 드웰러'는 등반거리 38미터에 이르는 대단한 크랙코스였다.
▲ 7월 10일(수)부터 13일(토)까지 3박 4일 동안 머물렀던 리버사이드 페리스레이크 캠핑장.
▲ 7월 11일(목), 리버사이드 쉐도우록을 찾았다.
▲ 쉐도우록은 예전에 채석장이던 곳에 다양한 루트들이 개척되어 있었다.
▲ 쉐도우록에서는 리버사이드의 주택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 쉐도우록엔 다분히 위압적인 오버행의 고난도 루트들이 많았다.
▲ 쉐도우록에 있는 루트들은 톱로핑 상태에서도 나에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 7월 11일(목), 늦은 오후 시간, 쉐도우록 등반을 마치고 인근에 사시는 기영형의 산악회 선배님 댁에서 LA갈비를 비롯한 푸짐한 한식을 대접받았다.
▲ 7월 12일(금), 마지막 등반지인 말리부 캐니언을 찾았다.
▲ 말리부 캐니언은 어프로치부터가 스릴 있었다.
▲ 자칫하면 물에 빠질 수 있는 트레버스를 한 후에 암장에 닿을 수 있었다.
▲ 말리부 캐니언의 'Mount Gorgeous' 사이트는 포켓 홀드가 많은 독특한 암질의 강력하고 긴 오버행 암벽이 특징이었다.
▲ 윤선생님께서 고난도 루트를 완등하시고 하강하는 것으로 이번 등반여행의 대미를 장식하셨다.
▲ 말리부 캐니언에서 마지막 단체사진을 남겼다.
▲ 7월 13일(토), 귀국길에 오르는 날 아침에 페리스레이크 캠핑장에서 체크아웃 한 후에 호수 건너편의 빅록(Big Rock)을 구경했다.
▲ LA 공항 근처의 장비점도 둘러보고...
▲ 맨해튼 비치를 산책하면서 오후 시간을 보내다가 밤 비행기로 귀국길에 올랐다.